정윤희 소설
행복도서관의 창문 너머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마당의 나뭇가지들은 여전히 앙상했지만, 초봄의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입춘이 지나면서 차가웠던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낮에는 햇살이 비칠 때면 미세한 온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마당 한편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한겨울 동안 잎을 모두 떨구고 버텨온 나무는 가지 끝에 작은 새싹을 품기 시작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진달래와 개나리 덤불이 자리하고 있어, 곧 다가올 따뜻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구석에는 이팝나무가 줄지어 서 있어, 몇 주 후면 하얀 꽃이 만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 사이로 작은 싹들이 흔들렸고, 그 모습이 마치 깨어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제이에게 봄은 마냥 따뜻한 계절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계절.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것도 봄이었다. 이팝나무 꽃이 피어나던 거리에서 그녀는 깊은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봄이 올 때마다 그녀는 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그녀는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사서로서의 삶,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 최근 들어 그녀의 고민은 단순히 직업적인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 고민 속에서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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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했어요?”
책을 정리하던 제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강철이 서가 사이에 서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도서관이 문 닫을 무렵이면 어김없이 나타나곤 했다.
“아직 정리할 게 좀 남아서요.”
제이가 대답했다.
그는 미소 지으며 한쪽 책장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게 버릇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사서의 숙명이죠.”
“그럼 저는 손님으로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게 숙명일까요?”
제이는 웃음이 나왔다. 강철은 언제나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도서관과 서점을 연결하는 여러 가지 문제로 자주 의견을 나누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는 제이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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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문을 닫고 난 뒤, 둘은 자연스럽게 도서관 마당으로 향했다. 초봄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별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겨우내 얼어 있던 마당 한편의 작은 화단에서는 새순이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즘 서점은 어때요?”
제이가 문득 물었다.
강철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쉽지 않아요. 대형 온라인 서점들이 할인 행사로 책을 팔면서, 작은 서점들은 경쟁이 안 되죠. 지역서점이 살아남기엔 너무 가혹한 환경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운영하는 이유가 있겠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단순히 책을 좋아해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업이라는 게 좋아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운영은 현실적인 문제니까요.”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서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업도 하고 있어요. 강연도 하고, 지역 행사에도 참여하고. 가끔은 문구류나 굿즈를 판매하는 것도 고민해요.”
제이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겠네요.”
강철은 고개를 저었다.
“쉽진 않지만, 그래도 누군가 와서 ‘이 책을 읽고 위로받았어요’라고 하면… 그게 모든 걸 버티게 하죠. 단순히 책을 파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그의 말에 제이는 깊은 공감을 느꼈다. 그녀 역시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그런 순간들을 경험했다. 사서라는 직업도, 서점 운영도 결국 사람을 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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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민이 많아 보여요.”
강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제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사서로서의 길, 그리고 제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도 그래요. 서점을 운영하면서도 항상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하죠. 하지만 가끔은 길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걸으면서 의미를 찾는 게 아닐까요?”
제이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을 정해진 답으로만 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강철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강철이 장갑을 벗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초콜릿 한 조각이었다.
“이거요. 오늘 서점에 오신 할머니께서 주셨는데, 나누면 더 맛있을 것 같아서.”
제이는 가볍게 웃으며 초콜릿을 받았다. 별빛 아래에서 초콜릿을 나누어 먹으며,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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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이 씨에게 도서관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이는 생각에 잠겼다.
“책과 사람을 연결하는 공간, 그리고 제게는 삶의 일부죠.”
강철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럼 저는 제이 씨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녀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음… 글쎄요. 아마도… 도서관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
강철은 가볍게 웃었다.
“그거면 충분하네요.”
둘은 그렇게 한동안 도서관 마당에 서서,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서관의 밤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제이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도서관의 밤, 그리고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거리. 어쩌면 그녀가 찾고 있던 답은, 이미 그녀의 곁에 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