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7일, 일본 아베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다는 법령 개정안을 공포했다. 화이트 리스트 제외 시행령 개정안은 8월 28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에 들어간다.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배제한다는 뉴스가 나오자 일본 제품을 사지 않고 일본관광을 가지 않는 등 일본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항일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일본이 우리나라와의 무역에서 화이트리스트 제외한 것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내 소재산업 국산화 지원을 한다는 아젠다를 발표했다.
정부가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일본을 진정으로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가 발행하고 있는 <출판저널> 511호 특집좌담 '출판의 국제화와 번역의 중요성'에서 패널로 나오신 박상익 우석대 교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셨다.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물리학자인,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토산업대 명예교수는 평생 해외여행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해요. 도시히데 교수는 영어를 못해요. 노벨물리학상을 받기 위해 스웨덴에 가서 수상 소감을 이야기할 때도 노벨상 수상자 중 유일하게 일본어로 수상 소감을 말했어요. 도시히데 교수는 일본어로 번역출판된 책과 자료 등으로 연구를 해 온 사람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만큼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죠. 우리 한국도 가칭 '번역청'이라는 기관을 설립해서 전 세계의 고급 지식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대학의 석박사들과 연구자들이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해 줘야 합니다." - <출판저널> 511호, 84쪽.
박상익 교수님이 이야기하신 대로,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때부터 번역국을 설립하여 전 세계의 고급 지식 정보를 일본어로 번역해 왔다. 학술정보 인프라를 탄탄하게 구축해 놓아서 다양한 학문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일본어로 번역된 풍부한 고급 지식을 바탕으로 활발하게 연구하는 풍토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학술 연구 인프라를 탄탄하게 갖추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소재산업의 육성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업에 당장 R&D 예산을 지원한다고 해도 소재를 개발하고 산업화 시키려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자. 박상익 교수님이 쓰신 <번역청을 설립하라>(유유)라는 책을 보면 실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에서 1998년부터 해외명저번역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2015년까지 18년간 396종 696권뿐이다. 한국연구재단이 운영하는 국가과학자 사업은 과학자 10명을 선발해 한 명당 매년 15억원씩 최장 10년간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는 반면, 명저번역사업의 총지원금은 10억원 정도이다. 2011년에 24억원까지 확대되었다가, 예산이 줄어서 2017년까지 매년 10억원이었고, 박상익 교수님이 청와대 국민청원 '번역청을 설립하라'라는 운동을 벌여서 2018년에 번역지원비가 18억원으로 늘어났다. 우리나라의 지식정보 인프라를 풍부하게 조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금보다 100배 이상 과감하게 번역지원 금액을 늘려야 한다.(박상익, <번역청을 설립하라>, 13-18쪽)
필자는 책문화생태계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생각을 해 본다. 진정한 극일은 우리 스스로를 이기데서부터 시작된다. 산업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성장한다. 우수한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대학의 학술 풍토, 연구자들이 생계 걱정 안 하고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는 연구환경, 전 세계의 고급 지식을 한국어로 활발하게 번역하는 번역자 양성과 출판환경 인프라, 전 세계의 고급지식정보를 편리하게 접할 수 있는 도서관시스템, 이를 모두 뒷받침해주고 어시스트 하는 정부 정책 등이 모두 결합하여 선순환 될 때 가능한 일이다. 결국 저술(번역)-출판-도서관-독자(연구자)로 이어지는 책문화생태계 모델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책문화의 건강성은 결국 모든 산업을 성장시키는 토대가 될 것이다.
출판은 모든 산업 성장의 뿌리와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출판을 사양산업 취급한다. 우리의 출판물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전 세계의 고급 지식정보를 번역출판하여 재빨리 독자들에게 제공해주는 인프라를 조성해야 한다. 전 세계의 다양한 출판물을 접할 때 우수한 출판물을 생산해 낼 수 있다.
당장 소재산업을 개발하기 위하여 기업에 연구개발비를 지원해 주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모든 산업의 토대인 출판, 나아가 책문화에 정부가 관심을 가지고 명저 번역지원 사업비도 100억원 대 이상으로 과감하게 늘리고, 도서관 수서 예산도 대폭 늘려서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풍요로운 책문화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우선이다.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미래를 위한 책문화 살리기 대책위원회'라도 만들어서 소재산업 연구 개발의 바탕을 탄탄하게 만드는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10년 후, 50년 후, 100년 후 한국의 미래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