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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닷빛 Feb 04. 2022

바닷빛이 뭐예요?

이름과 말 이야기

바닷빛? 그게 뭐냐고?


이십 대 중반, 그때 굳이 필명을 바닷빛이라고 한 이유가 있었어. 오글거린다고? 그래. 매우 인정.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오글거리는 이 이름을 지은 이유가 있었어. 혹시 들어봐 줄래? 


일단 바다를 좋아해. 난 어릴 때 튀니지라는 나라에 살았어. 축구와 아랍의 봄으로 이제는 꽤 알려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잘 몰랐던 곳이야.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에 있고,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유적이 아름다운 나라. 사하라 사막이 있는 나라이기도해. 튀니지에 살 때, 바닷가에 종종 놀러 갔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지. 엄마가 미리 불고기 양념에 재워온 양갈비를 함께 놀러 간 다른 사람들과 도란도란 구워 먹고, 수영하고, 아빠가 윈드 서핑하는 것을 보던 일들. 동생은 짠 물을 먹고 지금까지도 수영을 싫어해. 나도 고생하긴 했지만, 그때 수영을 배워서 지금까지 잘 써먹고 있어. 


그런 기억 때문일까? 바다는 바라만 봐도 마냥 좋았어. 부산에 처음 갔던 때가 유독 기억이 나. 그땐 이미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였어. 라디오 PD에 대한 로망이 참 컸거든. 일 년간 백수생활을 하다가 어렵게 들어간 회사였는데도, 고민이 많아졌어. 채널은 많고, 내가 원하던 프로그램을 맡는다는 보장은 없고. 회사 내외부에도 다른 일도 많았고, 개인적인 일로도 힘들었던 시기였어. 함께 여행을 갔던 일행과 헤어지고 해운대에서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었어. 홀로 아주 오래 바다를 바라봤어. 언뜻 고요해 보이지만 거센 파도에 일렁이는 바다, 백사장으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생각을 가다듬었지. 다 괜찮다고, 더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어. 피폐해진 마음을 가만히 안아주는 느낌이었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너른 품을 내어주는 바다가 되어주고 싶었어.


그럼 그냥 바다로 하면 되지 않았냐고? 거기에 빛을 굳이 끼워 넣은 건, 바다에 반짝이던 윤슬이 좋아서였어. 바다를 내리쬐는 그 빛의 잔물결이 유난히 눈에 박히더라. 따뜻하고 포근했어. 흔히 ‘빛’이라 표현하는 가시광선은 전자기파의 일부로, 400nm에서 700nm 정도에 이르는 파장을 가진대. 스무 살에는 그저 ‘빛’이라는 관념이 주는 밝음, 따뜻함이 좋았어. 그런데 이후 방송국에서 일을 하면서 눈부신 조명을 받는 유명인들의 일상을 조금은 가까이에서 보고 나니 빛이 강할수록 깊고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런 강렬한 빛을, 적어도 나는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어. 그저 바다에 내리쬐는 한 줌 햇살이면 충분할 것 같았지. 그렇게 (바다의) ' 빛'이 들어간 거지. 


‘바닷빛’이라고 사이시옷을 굳이 끼워 넣은 건...  미안해. 지적 허영심이야. “나 ‘사이시옷’ 아는 뇨자요~”라는 마음이랄까? (궁금하면 사이시옷) 어린 시절 외국에 살았고 덕분에 불어와 영어도 어느 정도는 하지만, 모국어는 어쩔 수 없이 한국어야. 한편으로는 과연 내 모국어가 한국어가 맞나 싶을 정도로 한국어가 어렵긴 하지만. 
 
물론 영어도 어렵지. ‘네이티브’가 아니니까. 미국에 산 지 10년이 다 되어가고 번역을 하며 사는 지금도 영어는 어려워. 하지만 알고 보면 한국어가 (객관적으로) 훨씬 더 배우기 어렵다고 해. 그 수많은 존댓말과 조사, 동사 활용을 생각해 봐. 밥은 먹었니? 밥도 먹어라. 밥이 넘어가니? 이렇게 조사만으로도 뉘앙스가 달라지는 한국어. 파랗다, 퍼렇다, 푸르다만도 모자라서 푸른, 푸르른, 시퍼런, 푸르뎅뎅 같은 단어까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봐. 그건 한국어를 모어로 하는 한국인이라면 감으로 알 수 있지만, 새로 다 배워야 하는 외국인 입장이라면... 나라도 너무 어려울 것 같아. 띄어쓰기는 시작하지도 말까?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는 유명한 우스갯소리도 있잖아.
 
모국어가 한국어라고 해도 한국인 대다수가 토익 점수가 한국어 능력 시험 점수보다 훨씬 높다는 데 500원을 걸겠어. 어릴 때부터 영어 단어는 기를 쓰고 공부하는데, 한국어는 당연히 잘한다고 생각하며 따로 공부도 잘 안 하잖아. 위에 쓴 윤슬이라는 단어도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순우리말이야. 라디오 PD가 되기 위해 한국어 능력 시험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나도 몰랐을 단어고. EBS <당신의 문해력>에서도 이 이야기를 많이 다뤘다는 얘길 보았어. 사흘을 4일로 아는 사람이 많았다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이렇게 조금씩 일부러라도 한국어 사용자들이 우리말을 아끼고 바르게 사용하는 데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 어느 때보다도 글이 넘쳐나는 시대에 빠르게 정보 습득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나도 다 잘하는 건 아니야. 이 글도 맞춤법 검사를 하지 않았으면, 많이 틀렸을 거야. 그래도 틀렸을 수도 있고.) 
 

얘기가 많이 새 나갔다. 다시 돌아가 볼게. 인생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 가장 어렵고도 중요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보았어. 마음에 참 와닿더라고. 과거의 나를 잘 돌아보고, 지금의 나를 잘 다독이며, 조금 더 나은 ‘나’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도 나를 도무지 모르겠더라고.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다니다가 다시 직장을 그만두고 번역을 본격적으로 하며 살기로 마음먹자마자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고 오랜동안 독박에 가까운 육아를 해서 그런 걸까? 그 길 어딘가에서 나를 잃어버린 거였는지, 아니면 원래 내가 이렇게 다중이였는지 모르겠어. 사실 둘 다겠지.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런 나. 세상만사 호기심 많고, 산만하면서도 꼼꼼하고, 밝은 듯 어둡고 어두운 듯 밝은 나. 하면 다 잘하는 거 같은데 또 잘하는 거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나.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로 시작하는 김국환 아저씨의 타타타 노래 있잖아. 나는 그 가사를 ‘난들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라고 가사를 바꿔 부르고 싶더라고. 

그래서 돌아가 본 거야. 

스무 살, 나를 조금 더 잘 아는 것 같았던 그 시절로. 그때 지었던 그 이름으로. ‘바닷빛’ 


이쯤 읽었으면 잘 알겠지만, 나는 말에 의미를 많이 욱여넣는 사람이야. 그래서 바닷빛도 삼행시로 만들었지. 운을 좀 띄어줄래?
 
바: 바다처럼 너그럽게

닷: 닷닷하고 다채롭게 (닷닷하다는 따뜻하다의 제주 방언이래)
빛: 빛처럼 찬란하게
 
 그러니까... 오글거려도 좀 참아줘. 다시 '바닷빛'으로 돌아왔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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