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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닷빛 Mar 09. 2022

큰일은 여자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2022년 3월 8일 여성의 날인 오늘, 나는 “큰일은 여자가”라는 후드 티를 꺼내 입었다. 내가 자원봉사 에디터로 있는 심플스텝스라는 비영리단체에서 디자인한 굿즈다. 참고로 미국에 있는 분들이라면 Bonfire 사이트에서 살 수 있다. (https://www.bonfire.com/simplesteps-aimhigh/)


Aim High. 좋다. ‘여자가’를 살리려면 Girls, aim high. 가 낫겠지만? (그렇다고 Women, aim high보다는 girls 쪽이 착착 달라붙는다. 근데 또 이걸 반대로 번역하려면 참 힘들다 ㅋㅋ 소녀들이여,...는 왜 그렇게 이상할까.)


 나라면 어떻게 번역할까. 일단 직역에서 출발해 본다. 
 Great Things for Women (to do) to do는 너무 뱀꼬리 같아서 일단 빼고.
 Boys, be ambitious를 패러디해서 Girls, be ambitious.라고 카피스럽게 갈 수도 있을 것 같고. 
 Girls can do everything?
 Girls are destined to greatness?
 Ain’t No Mountain Too High For Girls?(너무 나갔나... ㅋㅋ) 
 
 ***
 
 이 문구 때문에 “남성분께 선물하기도 어려웠고, 또 옷을 입고 다니기 다소 어려울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별에 특화되지 않는 문구가 나을 것 같다는 피드백을 보았다. “왜 큰일은 여자만?”이라는 첫인상을 받으셨다는 분도 있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나만 해도 이 티를 입을 때 살짝 움찔했으니까.


 물론 움찔한 지점이 살짝 달랐다. ‘내가 과연 이 티를 입을 만한 페미니스트다운 실천과 행동을 하고는 있을까? 그냥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스트의 시끄러운 빈수레가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당장 시아네 학교에 한국 사람들이 많다. “아이를 픽업하는 분들이 이걸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이 후드티를 입으면서 따라다닐(?) 꼬리표가 생기지 않을까?” 조심스럽기도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라벨이 (한국에서 특히) 천대받는 시국이다 보니 더욱 그랬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나도 이런 검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냥 적당히 쫌. 좋게 좋게 살자. 트러블을 일으킬 필요 있어?” 

“아니 이 정도도 트러블이야?”

“센 사람으로 구분되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알잖아.”

“야. 길을 막고 물어봐. 내가 세다니... 심지어 센 애도 못 되는데...”

이렇게 나 1과 나 2가 한참을 대화했다. (아니 참...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정말 고작. 후드티. 하나. 입는. 일이다. 부끄럽다.)


한심할지도 모르겠다. 시아 반 친구 아버님이 “멋진 티셔츠네요.”라고 건네주신 말에 알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른 (엄마) 분들이야 그저 눈인사 정도만 나누는 사이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뭐 사실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일일이 신경 쓸 수도, 그럴 필요도 없고.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고민한다. (걱정도 팔자...)
 

사실... 이게 다 조사 때문이다. (라고 일단 조사를 탓해보자.) 

조사 ‘은’과 ‘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매우 달라질 것이다. 그 문구를 보고 ‘여자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을 바꿀 수야 없겠지만, 일단 문구 자체가 큰일은 여자’가’지 ‘만’이 아니다.  ‘큰일은 남자가’라고 했다면 이렇게 속으로 속 시끄러운 난리가 났을까? 


Black Lives Matter가 한창일 때도 이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왜 흑인의 생명’만’ 중요하냐는 요지였다. 그래서 White Lives Matter라는 슬로건이 탄생하기도 했다. (최근 번역했던 책에서 이 캠페인을 번역할 때 그래서 더 골치 아팠다. 쉽게 가는 방법은 역시 음차?! 블랙 라이브즈 매터라고 하고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정도..로 병기한 걸로 기억한다.


쉽지 않은 문제다. 그 문제를 풀 실마리를 존경하는 여성학자 권김현영 님의 책,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의 머리말에서 빌려온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권력을 남성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권력의 의미를 바꾸는 데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페미니스트는 답이 없는 두 선택지에서 억지로 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선택지를 늘리거나 질문 자체를 바꾸는 사람이다.” (p. 5)
 
 “나에게 페미니스트란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사람, 알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는 올바름의 이름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p.8)


일단 권김현영이 권김현영이 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호주제 철폐를 위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부모성함께쓰기를 그만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계속 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엄마 때문이라고 한다. ‘권’은 ‘김’씨인 어머니의 엄마 성이라고 한다. 이 역시 외할머니의 아버지 성이니 결국 남자 성 아니냐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에 일갈하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근본을 따져 묻다가 아무것도 안 하느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모계를 기억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계속 쓰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엄마가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엄마는 엄마의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권김의 ‘권’이 엄마의 엄마 성이라고 설명하면서 꽤나 즐거워하신다. 나에겐 그 이유면 충분하다.”
 

몇 편의 퀴어영화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계속 게이냐고 묻는 질문에 평생 대답을 안 하기로 결정했다는 배우 권기하의 예도 책에 나온다. 멸시를 보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호의라고 해도 “게이는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아무 답을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이라는 말이 나온다. 


페미니스트냐고 묻는 말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나는, 그렇다고 답하는 게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나’의 대답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또한 ‘나’라는 페미니스트의 경험이 어떤 남자보다도 일을 더 잘하고 남자들만큼 일하고 채찍을 맞았다며 “이래도 나는 여자가 아닙니까?”라고 외쳤던 소저너 트루스의 경험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깨닫는다. 소저너 트루스의 물음은 “’남자 못지않다’는 결핍의 말을 통해 인간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자가 아니라면 누가 여자이며 그것이 여자라고 말하는 이는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p.89)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큰일은 여자가’. 큰일을 여자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한다는 이야기이며, 그걸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지를 물어보자. 조금 불편한 마음을 안고, 나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간다. 한국 엄마를 만나 이 후드티로 대화를 시작하고 싶다는 바람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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