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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닷빛 Nov 13. 2021

극한 직업 유학생 부인 4

눈부신 3월의 캠퍼스

3월의 캠퍼스는 반짝반짝 빛났다. 무려 8년 만에 학생으로 다시 만난 대학 캠퍼스였다. 말 그대로 눈이 부셨다. 물론 이 찬란한 3월도 쉽게 얻진 않았다. 12월과 1월 내내 연말연시 특집과 녹음, 편집, 인수인계까지 일정이 빼곡했고, 급기야 목/허리 고질병이 도져서 계속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렇게 숨 가쁘게 2월까지 회사 일을 마무리했다. 덕분에 2월 말에는 계속 차곡차곡 쌓였던 대휴와 남은 연가를 써서 친구들과 몇 년간 차곡차곡 모은 곗돈으로 커플 셋이 세부 리조트로 여행도 다녀왔다.


수업은, 각오는 했지만,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대학원 2년 과정 동안 한 학기에 보통 3시간 연강으로 이뤄지는 수업이 6개, 12학점 정도다. 1학년 1학기에는 1학점인 과목이 4개라서 들어야 하는 과목이 더 많았다. 공통 필수인 주제 특강 외에도 전공 필수인 번역학 입문, 국작, 영작은 1학점 짜리였다. 선택 필수였던 일반 번역 영한, 일반 번역 한영을 듣고 선택 수업으로 순차통역 영한, 문학 번역 한영 등의 수업을 들었다. 번역 과목에서는 늘 숙제를 해서 제출하면 선생님이 첨삭을 해주시고 피드백을 주시는 구조였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들 중 하나를 수업 시간에 같이 보면서 함께 논평하고 관련 표현들을 배웠다.


수업은 어려웠다. 영어야 오래 멀리 해서 당연히 어려움을 예상했지만, 사실은 한국어가 더 문제였다. 모어가 한국어인 많은 사람이 간과하지만, 한국어는 만만한 언어가 아니다.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메시지 자체보다는 비언어적인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야 하는 일이 많은 고맥락(high-context) 언어다.  (당장 나도 앞 문장에서 ‘한국어는’이라는 주어를  생략했다.) 고맥락 언어, 고맥락 사회의 예로 회식을 들어보자. 부장님이 “마음껏 시켜!”라고 하면서 짜장면을 드신다면? 명절 때 부모님이 “절대 내려올 필요 없다”라고 하신다면? 그렇다. 고맥락사회(의 언어)에서는 눈치싸움이 번번이 일어나고 행간을 잘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맥락을 잘 파악했다고 끝이 아니다. 한국어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맞춤법! 틀리게 (여긴 다르게 아닙니다!) 사용하는 단어는 그렇다 치고, 자기가 쓴 글의 맞춤법 검사를 해 보면 대부분 깜짝 놀랄 거다. 방송은 물론, 신문, 심지어는 책에서도 표준 띄어쓰기 원칙이 다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다. (나도 블로그 글은 맞춤법 검사를 안 해서 오류가 많을 것이다.)


한국어에 침투한 외래어는 또 어떤가. 소위 ‘보그체’라는 것처럼 특정 분야에서는 외래어를 과도하게 구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체로 자리 잡았다. 내가 학부 때 전공했던 사회과학 쪽도 대부분은 서양에서 (일본을 통해) 이식해 온 개념들이 많아서 전공책이나 관련 글에 어색한 번역투가 많았다. 그런 만큼  나는 번역투를 구분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번역에는 고유한 스킬도 필요하다. 번역학 입문에서 외국어 학습과 언어학, 문학 등의 학문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번역학의 개념들을 배웠다.  화용론, 연어, 맥락 담론 등 실전에 꼭 필요하지는 않을지라도 알아두면 좋은 개념들을 다듬었다. 원문이 출발어 (사회)에서 갖는 맥락을 파악하고 그 맥락을 도착어에서 구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번역이라는 말이다. 그러려면 원문에 충실하되 도착어와 도착어 문화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지나친 원문 충실성도 문제였다. 번역문은 최종적으로 도착어에서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혀야 된다. 그러나 내가 1학년 1학기 때 했던 번역은 원문에 지나치게 충실한 경향이 있었다. 한영은 도착어인 영어 원어민이 아니라서 그런다 치지만, 모어인 한국어에서도 직독직해에 불과한 어색한 번역문을 만들기 일쑤였다. 국문 해당 장르에서 통용되는 규칙보다는 원문을 중시했기 때문에 연설문의 농담을 너무 그대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었고, 한국말에서 영어 원문 표현이 너무 그대로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직역과 의역의 줄타기. 물론 아직도 최고의 번역은 어색하지 않고 잘 읽히는 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줄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학교생활 자체는 너무 즐거웠다. 통번역대학원 수업이 주로 있던 국제관은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인가 6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그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싱글벙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두 칸씩 겅중겅중 올라가는 나를 보고 동기들은 “언니, 그렇게 좋아요?”라고 물어보곤 했었다. “그럼~ 좋지~ 회사 안 가고 학교 오니까 너무~~ 좋아~~”라고 말하곤 했다. 적어도 여기서는 (회사와 달리) 나 개인에게 뭔가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제에 남들의 배 이상의 시간을 쏟아도, 내 번역문이 난도질당해도 좋았다. 물론 마냥 좋지는 않았다. 많이 부끄러웠고 민망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거니까. 언어 쪽 일을 하거나 오래도록 준비한 사람들에 비해 내 실력이 모자란 건 당연했다. 운 좋게 합격한 게 어디냐. 나는 발전 가능성이 많으니까!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늘 그렇게 의연하지는 못 했다.


그렇게 의욕을 불태웠던 3월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문제는 4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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