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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닷빛 Nov 10. 2021

극한 직업 유학생 부인 3

결국, 선택은 내가 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유학생 부인’이 되는 것은 오롯이 내 선택이었다. 회사를 휴직하고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한 것이 내 선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때는 2011년 가을, 회사 내외의 일과 개인적인 일로 많이 지쳐 있었다. 동기가 곧 휴직하고 석사를 하게 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나뿐인 라디오 피디 동기에게 의지하며 회사 생활을 하던 당시의 내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이야기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곧 통번역대학원 원서 접수 시기라는 공고가 떴다. 언제나 공부를 계속할까 늘 고민했지만, 적절한 전공을 찾지 못하고 있던 내게 안성맞춤 같았다. 나중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라도 영어 공부는 필요할 테니까. 내가 꼭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미국 유학 쪽으로 마음을 굳히던 남편과 계속 함께 살려면 앞으로 올 미국 생활에 도움이 될 테니까. (도움이 많이 되긴 했다.)


망설임은 많았다. 일단 내가 너무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주변에 통번역대학원 시험을 오래 준비하고 들어가서도 힘들게 졸업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은 더 컸다. 그래도 도전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원서접수 비용을 제외하면... 일단 도전!!! 서류를 서둘러 준비해서 마감을 하루 앞두고 원서를 접수했다.


통역 쪽은 스터디를 하나도 못 했을뿐더러 매일 생방을 하면서 ‘휘발되는 말’에 염증을 느꼈던 터라 번역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대학 졸업 후 문학번역원에 원서를 넣은 적이 있었는데 서류에서 떨어졌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나마 요르단에 살 때 미국인 학교를 다녔던 거나 특례 시험을 볼 때 공부하던 GRE 단어가 아주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다시 단어를 공부하고 독해 문제를 풀고 지문 번역을 조금씩 해 봤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합격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시험운이 좋은 편이다. 그때 번역 전공 시험 문제는 영한 지문을 각각 요약 번역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던 몇 개의 문제 중에 튀니지 시위를 시작으로 시작됐던 ‘아랍의 봄’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경제포커스’라는 프로그램을 담당할 때라 매일 시사 평론가와 전화 연결로 관련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던 터였다. 배경 지식이 있다 보니 모르는 단어나 표현은 적당히 눙치고 요약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글쓰기 연습이 돼 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언론사 스터디로 논술 작문 연습은 많이 해보았었다. 또 당시 담당하던 ‘경제포커스’에서 한 꼭지였던 ‘경제키워드’는 내가 질문지 원고까지 써서 담당했었다. 그러고 보면 뭐든지 배우고 익히는 게 좋다. 뜻밖의 순간에도 실력 발휘를 할 수 있게 된다. 오죽하면 도둑질도 배우면 는다고 했겠는가.


1차 시험을 본 후, 개편을 앞두고 다른 채널 (팀) 다른 프로그램으로 발령이 났다. 경제포커스는 진행자가 개인 사정으로 하차하고 새로운 진행자와 함께 프로그램 자체 개편을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함께 론칭하고 세팅한 지 얼마 안 되는 그 프로그램에 남고 싶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2월 말부터 휴직을 하게 될 수도 있다고 부장에게 사정을 밝혔다. 그 채널, 그 프로그램에 남게 해달라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인사 청원을 했다.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나는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발령이 나 바쁘게 개편을 했다. 얼마 안 있어 2차 시험을 보았다. 압박 면접이었다. 튀니지, 요르단에서 살다 왔다고 돼 있는데 ‘아랍의 봄’ 씨앗을 뿌린 건 아니냐는 농담은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라디오 피디 선배 중에 통번역대학원을 나오신 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회사로 돌아갔는데 굳이 비슷한 상황의 나를 왜 뽑아야 하겠냐는 질문에는 답변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으나마 기대를 품게 됐다.


합격 발표는 라디오 전체 체육대회 다음 날에 났다. ‘아... 정말 회사 다니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커졌던 때였다. 뛸 듯이 기뻤다. 나도 이제 회사를 벗어날 수 있다니!


그렇게 들어간 통번역대학원을 나는 한 달만에 못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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