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구나, 알아두겠다

오만도 체념 사이의 이상적인 중간지대

by 우연과 상상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듣는데 진행자가 자신의 올해 캐치프레이즈를 소개했다. 캐치프레이즈가 캠페인을 대표하거나 브랜드를 광고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줄만 알았는데 개인의 캐치프레이즈를 정하는 것도 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며 방송을 마저 들었다. 작년 그의 캐치프레이즈는 "그러라 그래" 였다고 한다. 이 말은 가수 양희은 님의 유행어(?)로, 자신을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에너지를 쓰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곧이어 올 해의 캐치프레이즈에 대해 소개했는데, 그는 그 문구를 '남태령 대첩'에서 따왔다고 말했다. ('남태령 대첩'은 지난 12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윤석열 대통령 구속 촉구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농업 4법 거부권 행사에 대한 반발로 인해 발생한 시위였다. 농민들은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향하며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서울 입구인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의 차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2030 여성들이 현장으로 모여들어 함께 시위를 이어나갔고 덕분에 경찰들의 강제 진압이 불가능해졌다. 대치 28시간 만에 마침내 경찰이 차벽을 철거했고, 트랙터는 관저로 이동해 윤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그의 캐치프레이즈가 남태령 대첩에서 오게 된 경위는 이랬다. 한 농민이 시위에 함께해 준 2030 여성들에 대해 "우리 딸들 수고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누군가가 자신을 퀴어라고 밝히며 사실 자신은 딸이 아니라고, 다소 어려운 퀴어 용어를 사용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은 농민의 답변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나도 잘 몰랐던 일이다). 그 농민은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라고 대답했고, 이 말을 들은 이가 "모르는 이로부터 정체성을 부정당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고, 감동적이었다."며 글을 올렸다.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너무 멋진 말 아닌지.


타인은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이해 불가능한 존재다. 노력을 하면 이해와 오해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는 있겠으나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간극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때때로 인간에게 불안을 야기한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내가 살아온 방식만이 진실이라 믿고 싶은 인간들은, 그래서 나와 다른 타인을 볼 때면 지적하고 싶고, 비난하고 싶고, 더 나아가 혐오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는 태도는 완전히 이해한다는 오만과 완전히 포기한다는 체념 사이 어딘 가에 있는 이상적인 중간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에 대해 몰랐어, 하지만 이제는 알아둘게. 이 짧은 두 문장 안에서 나는 상대방이 잘못됐다는 뉘앙스는 결코 찾을 수 없었다. 특히 '무지'가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아 더욱 좋았다. 피상적인 현상들을 편집해 상대를 혐오하기 딱 좋도록 빚어놓은 컨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알아두겠다" 태도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들린다.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나도 이 문장을 잘 기억해두련다. 그나저나 나의 캐치프레이즈는 뭘로 하면 좋을까. 일 년을 꼭 붙들고 갈 문장, 지금 내 상황에 꼭 맞는 문장을 만나기를 바라며 책이나 영화를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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