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뒤에 쓴 유서>를 읽고
<달력 뒤에 쓴 유서>라는 책을 읽었다. 이 소설은 아버지의 자살을 직접 목격한 화자의 이야기로, 자전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깨닫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획득하고 싶어서도 아니라고 했다.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소설로 쓰는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소설에서 주인공은 악성종양처럼 커지게 놔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소설에는 가족의 자살이라는 소재로 소설을 쓸 때 나올 법한 '신파적인 문장'들이 거의 없다. 작가는 그것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다. 독자로 하여금 느끼기를 바라는 주제의식 같은 것도 뚜렷하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소설의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많은 독자들은 작가들로 하여금 어떤 길을 제시해 주기를, 작가가 숨겨놓은 장치들을 마지막에 해소해줌으로써 독자에게 어떤 감동이나 깨달음을, 설사 소설을 읽으며 느낀 감정이 고통 뿐이라 하더라도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소설들과는 다르다. 작가는 그저 개인적인 체험들을 서술한다. 20년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장소를 마주하며 떠오른 기억들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작가가 견딜 수 없어서 쓰는 개인적인 체험이 과연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 작가는 글을 쓰면서도 계속 고민한다.
남은 생 내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 정희진 선생님께서는 고통에 위계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고통은 타인이 대신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에 고통의 경중을 함부로 평가해선 안 되겠으나, 나는 고통에 위계가 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가족의 자살을 겪은 사람, 특히 자살의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그의 인생이 그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다. 그 사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힘들 것이다. 평생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거대한 사건 앞에서 글을 쓰는 행위가 도움이 되기는 할까.
글을 쓰면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나는 절반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답을 찾을 수도 있고, 못 찾을 수도 있다. 나 역시 그 사건에 관해 글을 쓰고 소설도 쓰고, 그러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그 사건을 소화시키려고 노력해봤지만, 답도 의미도 찾지 못했고, 여전히 소화되지 못한 감정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글을 쓰며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답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글을 쓰는 행위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글의 내용보다는 글을 쓴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지도 모른다.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묵은 감정들의 배설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보다는 더 큰 의미가 있다. 한편의 완성된 글이 되어 나오자 설명하기 힘든 만족감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나는 능동성의 회복이 아닐까, 뒤늦게 짐작하게 됐다. 글을 쓰는 것은 사건에 일방적으로 지배를 받으며 괴로워하는 수동적인 피해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질문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 고통을 능동적으로 읽어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니까. 그 고통 속을 내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다짐이니까.
며칠 전 들었던 신형철 평론가의 강연에서 그는 카프카의 소설을 해석하며 고통 '받는' 인간이 아니라 고통 '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카프카의 소설에는 거대한 인생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인간의 모습이 나온다. 하루 아침에 벌레로 변하고, 하루 아침에 아무런 잘못도 없이 끌려가 죽는다. 카프카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명제 앞에서 한낱 인간은 인생에 상대가 되지 않는 나약한 존재임을 소설을 통해 드러낸다. 인간이 고통받고, 패배하는 건 숙명인 것이다. 고통과 패배가 숙명이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가. 그렇지 않다. 고통 '받는' 것에서 나아가 고통 '하는' 인간이 있다. 고통과 대결하고, 고통을 견디고, 고통이라는 주체가 나를 집어 삼키지 않게 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사람들. 극복만이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필패의 운명임에도 우리는 고통 '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달력 뒤에 쓴 유서>가 내게는 고통 '하겠다'는 선언문처럼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