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까지
<작은 땅의 야수들> 드디어 다 읽었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로 주인공은 '옥희'라는 이름의 기생이다. 하지만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고 작가가 인물 모두의 내면을 묘사하는데 그 묘사가 무척이나 세련되고 영리하다. 나 스스로가 인물 묘사를 어려워해서인지 작가의 탁월한 능력에 대해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능력도 훌륭했다.
책을 다 읽고 유튜브로 김주혜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9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쭉 그곳에서 살다가 지금은 결혼하고 남편과 런던에서 거주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자신을 미국인이거나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으며 자신의 정체성은 한국인 한 가지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제야 빛을 보고 있는 한국 문화에 관해서 그녀는 한국 서사는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인물이 입체적이며 전개가 극적이고 마지막에 카타르시스를 줘서 전세계 독자들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주며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이것이 도파민국의 저력인가...)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로 작가가 실제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며, 그 이야기를 자신의 첫 소설에 담아냈고, 첫 소설로 톨스토이 문학상이라는 큰 상을 받았는데, 그녀의 서사 또한 극적이며 카타르시스를 주는 한국 서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그녀가 사용하는 묘사들을 보면서 천재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첫 소설로 큰 상을 받은 천재 작가도 수많은 거절을 겪었다고 했다. 이 소설은 2년 반 집필, 2년 반 수정, 1년 최종 퇴고의 시간을 거쳐 6년 만에 탄생한 소설이었고 시간이 길어졌던 까닭은 당연히 출판사의 거절 때문이었다. 첫 소설을 6년 동안 붙잡고 있는 건 정말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힘든 일이다. 투고하는 곳마다 계속 거절 당하고, 이걸 붙들고 있는다고 한들 잘 되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회자가 어떻게 6년 동안 집필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냐 하니 그녀가 살면서 영감을 받았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딱 두 번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가난했던 유학시절 학비가 부족해 프린스턴 대학이 아니면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시험을 보러 갔는데 갑자기 차이코프스키 음악이 들리더니 정답이 다 보였다는 믿거나 말거나... 작가라서 지어낸 말인가 싶은 느낌적인 느낌의 에피소드 하나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소설을 쓰기 전에 받은 영감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녀가 조깅을 하는 순간 설산의 사냥꾼과 호랑이가 보이면서 갑자기 불현듯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써내려 간 내용이 이 책의 에필로그가 되었다고. 결론적으로 첫 소설 집필을 6년 동안이나 매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감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엄청난 영감을 받고 쓴 소설임에도 수없이 퇴짜를 맞았다는 얘기가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포틀랜드' 출신이라는 것이다. 나의 포틀랜드 사랑은 10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작년에 포틀랜드 여행을 통해 마침내 버킷리스트를 이뤘다. 나는 <H마트에서 울다>라는 에세이를 쓴 미셸 자우너라는 작가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녀 또한 포틀랜드 출신이라 나는 분명 포틀랜드와 인연이 있는 거라고 혼자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김주혜 작가도 포틀랜드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 땅에 숨겨진 기운이 있나...? 지금이라도 짐 싸서 가야 하나? 싶은 강렬한 이끌림...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서 작가님께 메일을 보냈다. 궁금했던 질문들을 두서없이 적어내려갔다. 워낙 유명하시고 바쁘신 분이라 답장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겠지만, 그래도 포틀랜드는 못 참지 ㅋㅋㅋ 내 마음을 표현한 것만으로도 되었다 싶다. 답장이 오면 무척 기쁘겠지만.
내가 김주혜 작가를 '인간'적으로 멋지다고 생각한 이유는 다름 아닌 호랑이와 표범에 대한 그녀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톨스토이 문학상의 상금 전액을 연해주에 있는 호랑이, 표범 보존 단체에 기부했다고 했다. 호랑이랑 표범을 위해 기부를 했다는 사실은 살다 살다 처음 들어보았다. 그릇 크기 자체가 남다르며 그녀가 바라보는 시야 또한 범인들에 비해 훨씬 넓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히 독립운동가의 후손 답구나 싶었고, 무척 멋있었다. 자신이 기부한 돈으로 1년, 2년 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고, 그러나 자기는 30년, 50년 뒤를 내다보고 한다고 말했다. 소설도 100년을 거슬러 써내려간 만큼, 그녀가 감각하는 미래의 범위가 100년 후까지 길게 뻗쳐 있는 것만 같다.
인터뷰 말미에 그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전망도 내놓았다. 그녀는 독자들을 향해 희망을 잃지 말라고 했다. 우리에게 수많은 역경이 있었으나 결국 넘어오지 않았냐고. 희망이라는 단어를 섣불리 말하기 어려운 시국이지만, 눈을 조금만 더 크게 뜨면(근데 이제 지금은 쫌 더 크게) 희망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어려운 시국에도 꿋꿋하게 옳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그 증거다. 가려진 희망을 눈에 불을 켜고 찾으며 글을 써내려가는 작가님이 너무 멋져보였다.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지만, 우리의 역사도 그녀의 바람처럼 마침내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마무리 되기를 바라며 오랜만에 희망에 기대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