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의 등장과 대활약
“정난주가 돌아왔대.”
“학교 또 시끄럽겠네.”
매번 사고만 치던 난주가 어찌저찌 구치소에서 풀려나와 학교로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는 많았지만, 정작 난주가 학교에 나타나자 모두들 조용했다. 교사든, 학생이든 상관없이 난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일 테다. 오토바이 절도범, 교통사고 가해자, 무면허 운전자라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정난주는 더 이상 그저 그런 보통의 일진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난주는 조용히 자기 자리에 엎드려 오전 내내 잠만 잤다. 오전 일과가 무사히 흘러간 것에 다들 안심했는지, 서서히 긴장을 풀고 예전의 분위기를 되찾아가는 듯했다. 점심시간 중에 일어난 사건 전까지는...
“안 한다고 몇 번을 말하냐고.”
“아, 너새끼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협조 좀 해 주라 새꺄.”
“같은 얘길 몇 번이나 하게 하냐. 밥 처먹는 데까지 기어와서는... 얌전히 처먹고 가라.”
난주가 하다하다 안 되어서 윤수를 직접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완강히 거부 의사를 밝히는 윤수에게 난주는 초강수를 두었다. 윤수의 식판을 엎어버린 것이다.
“야이 씨발새끼야. 좋게좋게 말로 하니까 내가 만만해 보이냐? 나 예전의 정난주가 아니야. 내 눈깔 쳐도는 거 보고 싶어?”
“...협조를 구하는 자세가 아니네.”
온갖 반찬을 몸에 뒤집어쓰고도 윤수는 태연했다. 잃을 것이 없는 자의 태도였다.
“너. 경고했어. 내가 너 죽일 거야.”
섬뜩한 한마디를 남기고 난주는 저만치 사라졌다. 옆에 있다 함께 봉변을 당한 건이가 티슈를 잔뜩 들고 윤수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렇게 보채는데 들어주지 그러냐.”
“일진놀이 재미없어.”
“참, 희한하다 너란 놈도.”
건이와 윤수의 표정이 어두웠다. 왠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데 채윤수가 가만히 있을까?”
난주의 괴롭힘 타깃이 된 건 엉뚱하게도 반이였다. 3층 서편 여자화장실 세면대. 그곳에서 난주가 반이의 머리채를 잡고서 무려 서른 번 이상을 물에다 처박고 있는 중이었다. 반이는 지칠 대로 지쳐 탈진할 지경이었지만,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이곳은 이미 난주 패거리가 봉쇄해 놓은 터라 그 누구도 찾아올 수 없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난주 패거리 일원들 말고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너한텐 아무 감정 없어. 대의를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해 줘. 미안.”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난주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윤수를 네 편으로 만들고 싶은 이유가 뭐야?”
“뭐. 답할 의무는 없지만 고생하는 거 생각해서 답해 줄게.”
난주는 1인자답게 여유를 한껏 부리며 바닥에 침을 한 번 뱉고는 말을 이었다.
“한얼이, 서울 시내 고등학교 싹 다 먹을 거거든. 그러려면 윤수의 힘이 필요해. 반드시.”
반이는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 모습에 난주는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렸다.
“이년이 어디서 처웃고 지랄이야?”
반이의 불쌍한 머리채는 또다시 잡혀 세면대에 얼굴이 처박히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무려 서른여섯 번째였다. 반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 시각. 여자화장실 앞에서 너무 오랫동안 서 있는 학생들을 수상케 여긴 한 선생이 학생들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너네 아까 한 30분 전부터 여기 있었는데, 수업도 안 들어가고 왜 계속 여기 있어?”
“뭔 상관? 가던 길 가세요.”
“선생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너희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놔 짜증나네 진짜. 가면 될 거 아녜요. 참나.”
괜한 의심을 살까 두려웠는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선생도 이만 돌아서려는데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년이 어디서 처웃고 지랄이야?”
선생은 직감적으로 움직였다. 이성적인 판단이고 뭐고 없었다. 그냥 문을 발칵 열어버렸고,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너... 너... 정난주 너...”
반이는 열린 화장실 문과 그 너머로 보이는 선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실신해 버리고 말았다. 반이를 안심하고 쓰러지게 만든 그 얼굴은 바로 윤이었다.
“그만 울어. 나 괜찮대두.”
“정난주 이 썅년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건이는 보건실 침대 위에 누운 반이의 손을 꼭 붙잡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울었다. 이를 갈다가 반이의 얼굴을 보고 울고, 또 이를 갈고의 무한 굴레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윤수도 그 옆에 서 있었다.
“미안하다, 하반. 내가 면목이 없다.”
“그게 왜 네 탓이야. 괜한 자책은 하지 마.”
“못 구해줘서 미안해, 반이야... 내가 미안해...”
“작정하고 괴롭히는 걸 네가 어떻게 막아. 선생님이 빨리 발견해 주셔서 그나마 다행이지.”
반이는 우느라 들썩이는 건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좀 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형한테 꼭 감사하다고 전해 줘.”
“내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정난주... 내가 죽일 거야.”
“그렇게 하지 마, 차건. 그건 날 위한 게 아니야.”
의아해진 건이는 반이를 올려다보았다.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다면 우리에겐 파멸밖에 남지 않아. 전략을 써야지.”
반이는 그렇게 말하며 윤수를 바라보았다.
“정난주가 너를 왜 원하는지 알아, 채윤수?”
“...일진놀이 같이 할 상대가 필요하겠지.”
“그런 시덥잖은 일로 널 끊임없이 귀찮게 하는 건 아니야.”
“그럼 뭔데.”
“정난주는 서울 시내 고등학교 전체 통이 되려고 해.”
“헐.”
건이는 저도 모르게 단말마를 내뱉었다.
“어이없지? 나도 듣고 너무 기가 막혀 웃었는데, 그게 정난주 화를 돋우었지 뭐야. 또 물에 처박혔지 뭐.”
건이는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반이를 바라보았고, 반이는 건이를 꼭 한번 안아주고는 윤수에게 이어서 말했다.
“정난주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윤수 너는 당분간 걔를 도와줘.”
건이와 윤수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걔가 바라는 대로. 정말 서울 시내 통이 될 수 있도록 윤수 너의 힘을 빌려주란 말야.”
원래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서워지는 법이다. 눈치도 철도 없는 건이는 반이가 무슨 얘길 하는 건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여태 이 험한 학교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완력으로 싸워 왔던 윤수는 거기까지만 말해도 반이가 어떤 복수를 꿈꾸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알았어.”
건이는 깜짝 놀라 윤수를 바라보았다.
“야, 채윤수.”
“몸조리 잘해라. 난 간다.”
“야, 윤수야! 야!”
건이가 아무리 불러세워도 윤수는 뒤도 보지 않은 채 보건실을 나갔다. 건이는 윤수가 나간 보건실 문 너머와 반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가늠해 보려 애썼다.
“건이야. 나 물 한 잔만.”
“엉? 으, 응. 그래.”
하여간 틈을 주지 않는다. 반이의 한마디에 건이는 상황 판단이고 뭐고 만사 제치게 된다. 물. 따뜻한 물 한 잔이 지금 건이에겐 제일 중차대한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