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심연을 무심하게 건드리는 내밀한 음악
왼쪽부터 미니 앨범 [Dystopian's Eutopia] (2023), 정규 3집 [Healing Process] (2006), 1집 [Let It Rain] (2003), 6집 [Newton's Apple] (2014), 4집 [Separation Anxiety] (2008), 5집 [Slip Away] (2012), 2집 [Walk Through Me] (2004), 7집 [C] (2016)이다.
음악을 잘하는 것도 알겠고, 왜 좋은지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괜히 좋은, 그런데 늘상 달고 살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그런 음악들이 있다. 내게는 라디오헤드(Radiohead)나 콜드플레이(Coldplay)가 그러하고, 오늘 소개할 넬(Nell)의 음악이 그러하다.
넬의 음악은 무척 감성적이다. 그것도 피상적으로 쓱 훑고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거대한 창으로 심장을 꿰뚫을 듯 강력한 힘으로 깊게 파고든다. 보컬 김종완은 탁월한 연기자이다. 세상 여린 것처럼, 곧 바스라질 것처럼 노래하면서 실상은 듣는 이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고야 만다.
늘상 그랬던 것처럼 연대기 순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넬의 디스코그래피를 세는 일은 조금 복잡하다. 이들이 언더그라운드로 활동하던 시절에 냈던 1집과 2집이 있긴 한데, 이것을 함께 치면 앞서 정규 1집으로 소개했던 2003년작 [Let It Rain]이 정규 3집으로 바뀌어 버린다. 하지만 넬 멤버들도 그렇고 점차 메이저 데뷔를 기준으로 디스코그래피를 산정하는 분위기라, 언더 시절의 앨범들은 일단 제외하고 [Let It Rain]을 1집으로 간주하여 작성하려 한다.
[Let It Rain]은 타이틀곡이었던 'Stay'가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이 당시 무려 '서태지'의 극찬을 받은 밴드라고 마케팅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만큼 흡인력이 장난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의 연주 실력도 준수했지만, 아무래도 프런트 맨이자 보컬인 김종완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김종완이 'Stay'에서 부르는 노래는 처연하고 애절하지만 울먹임은 없다. '조금의 따뜻함이라도 간직할 수 있게 해 줘'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어떤 끝자락만이라도 붙잡고 싶은 절실함이 한껏 느껴진다. 진심은 통하는 법일까. 이 곡은 언더그라운드에 숨어 있던 밴드 넬을 메이저 리그로 급부상하게 만들어 주었다.
'Stay' 외에 김종완의 색다른 매력을 느껴보고 싶은 분이라면 이 앨범의 수록곡 '믿어선 안될 말'을 들어보시길 바란다. 이 곡에서 김종완은 무려 그로울링(!)을 선보이는데, 배신의 상처를 노래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는 듯하다.
넬의 흥행 신화는 이듬해 발표한 2집 [Walk Through Me]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타이틀곡은 'Thank You'. 이 곡은 'Stay'의 확장판이라고 여겨도 될 만큼 구성이 비슷한데, 표현의 난도는 훨씬 더 높다. 진성과 가성을 자유롭게 오가는 김종완의 능수능란한 창법이 이 앨범에서 완전히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 2집은 1집보다 앨범 전체로 듣기에 훨씬 지루함이 덜하고 완성도가 높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특히 '백색왜성'이나 '부서진 입가에 머물다'와 같은 곡들은 놓치지 말아야 할 이 앨범의 필청 트랙이다.
2006년에 발표된 3집 [Healing Process]는 무려 2CD에 18트랙으로 구성되어 있다. 1, 2집에서만큼의 대중적 인기는 구가하지 못했으나, 이 앨범에도 숨은 명곡이 많다. 아니, 오히려 내 경우에는 1, 2집보다 3집을 명반으로 꼽고 싶은 생각이다. 넬의 음악이 대부분 그렇지만, 3집의 경우는 훨씬 더 내밀하고 깊다. 어쩌면 1, 2집만큼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이것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앨범 수록곡이 너무 많아서 듣기에 부담스럽다는 생각이라면, '마음을 잃다'와 '한계'만은 반드시 듣기를 권한다.
2008년작인 4집 [Separation Anxiety]는 넬을 대표하는 히트 레코드가 되었다. 타이틀곡 '기억을 걷는 시간' 때문이다. 이 곡은 정말 훌륭하다. 각각의 테마를 떼놓고 보아도 완전히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결점을 찾기 어렵고, 그 각기 다른 테마들이 한데 어우러져 완성품의 형태로 나타났을 때는 '어떻게 이것들이 이렇게 합쳐질 수 있지?' 하는 생각에 희열마저 느껴진다. 광활한 음역대를 자유롭게 누비는 김종완의 보컬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하지만 앨범 전체로 듣기에 4집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히트곡 '기억을 걷는 시간'이나 후속곡으로 활동했던 '멀어지다'의 높은 완성도 때문에 다른 곡들에는 빛이 가 닿지 않은 느낌이랄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앨범 전체로 보면 나는 3집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나온 5집 [Slip Away]이다. 타이틀곡은 '그리고, 남겨질 것들'인데, 잔잔하다. 아마도 '기억을 걷는 시간'의 성공에 다소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 성공의 기운은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김종완은, 넬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지쳤을 수도 있다. 쿨 다운(cool down)이 필요했을 것이다. 5집은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 조용해지고 싶은, 평온해지고 싶은 느낌.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뿌연 연기 같은 성공의 기운에 기대려고 하지 않아서. 역시 그만큼은 지혜로운 사람들이구나, 싶어서.
2014년에 발표한 6집 [Newton's Apple]은 2개의 EP를 선공개한 후 앨범으로 묶는 형태로 내놓았다. 타이틀곡은 '지구가 태양을 네 번'. 넬의 앨범 중에서 수록곡 수로는 가장 많은 21트랙이다. 그만큼 음악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한 앨범이기도 하다. 주로 얼터너티브 록 계열의 어두운 음악을 선보였던 것과 달리 이 앨범에서는 'Ocean of Light'와 같이 청량감 있고 밝은 곡도 몇 곡 만나볼 수 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애초에 타이틀곡 '지구가 태양을 네 번'마저도 사운드만 듣자면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물론 노랫말은 여전히 슬프지만). 이 밖에도 들을 만한 곡이 많다. '타인의 기억', '침묵의 역사', '환생의 밤', '백야' 등을 추천한다.
내게는 가장 애매했던 앨범이 7집인 [C]였다. 아무리 들어봐도 음악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듣고 있다. 왜 그럴까. 이유가 뭘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느낌이 자꾸만 드는 건 왜일까. 그렇다고 음악이 나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것이다. 왜 다른 앨범과는 달리 이 앨범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걸까. 수수께끼 같은 앨범이다. 이유를 아시는 분은 댓글로 말씀 부탁드린다.
그렇게 한동안 넬은 기나긴 공백기를 갖다가, 2023년에 미니 앨범 [Dystopian's Utopia]를 가지고 돌아온다. 앨범 제목 참 역설적이고 넬답다. 디스토피안의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일까. 이 앨범을 다 듣고 나니 최진영의 소설 [원도]가 떠올랐다. '왜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죽지 않는 거야?'라는 질문을 안고 사는 원도. 절망의 끝에 서서 이 세상 따위 다 죽어버리라고 고함치는 원도의 모습이 상상 속에서 보이는 듯하다. 아무튼 넬의 음악은 여전히 건재하다. 날것의 마음을 기꺼이 내보이는, 참 용감한 밴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