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더그라운드 록의 기준점을 세운 밴드
왼쪽부터 들국화 스페셜 앨범 [들국화] (2013), 정규 2집 [들국화 II] (1986), 3집 [들국화 3] (1995), 1집 [들국화 I] (1985), 전인권 정규 3집 [다시 이제부터 (운명)] (2003), 1집 [전인권 1집] (1988), 4집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 (2004), 2집 ['89 지금까지 또 이제부터] (1989), 콜라보레이션 앨범 [전인권 & 한상원 #01] (1998), 스페셜 앨범 [1979~1987 추억 들국화] (1987), 최성원 정규 1집 [최성원] (1988)이다.
들국화를 두고 '한국의 비틀즈'라 빗대는 것은 과언일까. 자유분방한 영혼을 바탕으로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는 전인권을 존 레논(John Lennon)에, 여리고 서정적인 감성을 표방하는 또 다른 천재 최성원을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에 비유하는 것도 과도한 비약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록 비틀즈는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록 밴드이고, 들국화는 대한민국 한정이긴 하지만 적어도 한국 록의 역사상 들국화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밴드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들국화의 1집 [들국화 I]은 한국 대중음악상 100대 명반에 무려 부동의 1위로 선정되어 있다. 이 앨범이 명반인 이유는 수도 없이 많이 들 수 있지만, 딱 한 마디로 요약하면 '판을 바꿨기 때문'이다. 트로트를 비롯한 성인가요 일색이던 가요계에 '행진'을 외치며 나타난 들국화는 존재 자체가 센세이션이었다. 끝끝내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지만 왠지 알 것만 같은 '그것만이 내 세상' 또한 그 혹독한 시절을 살아내던 수많은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들국화 멤버들 스스로가 돌아보건대, 이들 스스로 '록 밴드'로서의 정체성을 처음부터 표방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음악적 뿌리는 조동진, 해바라기 등 포크에서 뻗어나왔다고 (본인들은) 주장한다. 그래서인지 들국화의 음악은 마냥 록킹하게 휘갈기는 느낌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축복합니다'나 '매일 그대와'처럼 잔잔하게 감성을 어루만지는 쪽에 가깝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전면에 내세웠던 '행진'이나 '그것만이 내 세상'도 그 곡이 미쳤던 영향력이나 변화 때문에 '록'이라는 평가를 받을 뿐 음악 장르적으로 보면 록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본인들의 음악은 본인들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까. 그들 말이 맞는 셈이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제발'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2집이 나오는데, 이 곡 '제발'에서 전인권의 목소리가 그야말로 절창이다. '제발 그만해 둬, 나는 너의 인형은 아니잖니. 너도 알잖니. (중략) 제발. 숨 막혀. 인형이 되긴. 제발. 목 말라. 마음 열어 사랑을 해 줘.'라고 노래하는 전인권의 목소리에는 보편적인 연인 사이에서의 사랑 그 너머에 있는 인류애 같은 것마저 엿보인다. 서로를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중하지 않고 감시하고 검열하며 처벌을 일삼았던 그 당시의 행태와 맞물려 들어보면 느낌이 묘하다.
들국화는 2집을 끝으로 흩어지고, 전인권과 허성욱은 스페셜 앨범 격인 [1979~1987 추억 들국화]라는 앨범을 내놓는다. 이 곡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사랑한 후에'이다. 어머니를 추억하며 써내려간 전인권의 가사와 절규하듯 토해내는 노래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이다. 이 곡은 이듬해(1988년) 발표되는 전인권의 첫 솔로 앨범에도 수록된다.
1988년에는 최성원도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제주도의 푸른 밤', '이별이란 없는 거야' 등의 스테디 셀러를 내놓는다. 들국화 시절에는 전인권의 아성에 가려 미처 드러나지 못했던 최성원의 여리면서도 소년 같은 풋풋한 감성을 이 앨범에서 맘껏 느낄 수 있다.
90년대의 들국화는 방황과 고난의 시기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전인권에게 그러했다는 의미가 맞겠다. 최성원은 프로듀서로 전향하여 이적, 김진표를 멤버로 한 팀 '패닉'을 발굴하는 등 여전히 잘 나갔으니까. 반면 전인권의 방황은 무척 길었다. 약물 문제 때문에 감옥과 병원을 수시로 드나들고, 어쩌다 무대에 서면 완전히 망가진 목소리로 노래를 쥐어짜는 모습을 보이는 등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 3집 [다시 이제부터 (운명)]과 4집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을 내리 발표하면서부터라고 추정된다. 적어도 이때는 '다시 이제부터', '걱정 말아요 그대'와 같이 소소하게 화제를 모으는 좋은 곡들도 발표했으니 말이다. 특히 '걱정 말아요 그대'는 발표 당시보다도 세월이 훨씬 더 많이 흘러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OST로 이적이 가창하면서 다시 역주행하기도 했다.
들국화가 가장 화려하게 만개한 시기는 2013년이다. 이때 들국화는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의 3인으로 재결합하고 앨범 [들국화]까지 발표하는데 이 앨범이 정말 명반이다. 2CD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챕터에는 7곡의 신곡이 수록되어 있고 두 번째 챕터에는 기존 곡들을 재편곡해서 무려 12곡이나 수록해 두었다. 그리고 이때 재결합 기념공연도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이 공연을 직관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전인권의 노래를 듣는데, 노랫소리가 귀가 아니라 뒤통수를 뚫고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가수들의 라이브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전인권의 소리는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퍼포먼스를 해대며 부르는 것도 아니고, 의자에 차분히 앉아서 무릎을 두드리며 태연하게 부르는데 저음이든 고음이든 가리지 않고 노래의 음절 마디 하나하나가 가슴에 가시처럼 콕콕 박히는 것 같았다. 실로 엄청난 공연이었다.
그 이후에 몇 년이 지나 '전인권밴드'로 팀을 재편성하고 야외 무대에서 라이브했을 때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리로 온몸이 관통당하는 느낌. 진정한 장인은 저렇게 하는구나. 설치지 않아도, 흔들지 않아도, 그냥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데도 받는 사람은 맥없이 픽픽 쓰러지게 되는. 그런 노래를 하는구나. 두 번 들어도 놀라운 노래였다.
전인권은 지금도 약은 물론 술, 담배도 하지 않으면서 목소리 관리를 열심히 한다고 한다.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바로잡고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살아가는 거장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 사이 주찬권은 하늘의 별이 되었고 최성원도 제주도 바깥으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여서 들국화의 재결합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전인권이 아직 건재하니 조금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후배 뮤지션들에게도 좋은 귀감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