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간병생활 중 겪은 소중한 체험
한국에 정말 오랜만에 다녀왔다.
인천공항에 발을 들였을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 드디어 부모님과 형제들이 사는 곳에 왔구나’ '도대체 몇 년 만인가?' 하는 안도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한국을 가게 된 제일 큰 이유는 아버님의 간병을 위해서였다. 아버님은 올해 3월 말 인공 고관절 수술하신 이후 각종 합병증으로 투병생활을 하시고 계셨다. 24시간 보호자의 간병이 필요하신 상태라서 지금까지 가족들과 전문 간병사가 번갈아 가면서 아버님을 돌보고 있었다.
멀리 있는 나도 돕고는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참 답답했었다. 그래서 모처럼 한국에 와 있는 동안은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고, 아버님 케어와 간병에 집중하고자 다른 일정을 아예 잡지 않았다.
아버님이 입원해 계시는 병원에 처음 들어섰을 때,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는 아버님을 보고, „아버지~” 하고 나도 모르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고, 딸을 알아보시는 아버님도 „이제 왔구나, 많이 보고 싶었다” 하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토록 기다렸던 아버님과의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이었다.
아버님을 만난 기쁨과 감동에 날아갈 것 같았고 힘들어도 병원생활을 잘 이겨내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때부터 짧지만 밀도감 있는 내 인생에 첫 병원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루 3-4번 아버님 식사와 약 챙기기, 하루에 몇 번의 기저귀 갈이, 몸 닦기, 시트와 병원복 청결 정리.. 이 같은 일들을 다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버리고 잠시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었다. 간병을 생전 처음 하는 초보라서 여러 면에서 서툴러서 뭘 하든지 시간이 더 지체가 된 점도 있었다.
취침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늦은 밤에도 수시로 간호사님들이 병실에 오셔서 환자상태를 점검하고 링거 수액을 교체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누워는 있어도 깊은 숙면을 취하지 못한 채 반쯤 깬 상태로 잠을 잤다. 며칠간 이런 수면부족 상태가 이어지니 육체적으로 체력이 부치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런데 사실, 직접 겪어 보니, 간병 시 체력적인 힘겨움보다 심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더 크게 작용하는 듯했다.
환자의 불안정한 컨디션에 따라 감정 상태도 기복이 심하다 보니 아버님이 아프시거나 예민하실 때는 나도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행여라도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불안한 마음에 평정심을 잃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버님이 계시는 병실이 중환자실이었기 때문에 옆 환자들의 몸에 연결된 의료장비나 산소용 호스, 수액 링거가 많았다. 때로 환자분 의료장비에서 삐~하고 큰 경고음이 갑자기 울리는 때면, 매우 바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의 발길에, 가족은 아니지만 옆에서 보는 나도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24시간 병원에서의 간병생활에 대한 의미가 이제 실질적으로 가슴에 와닿았다.
하지만 의기소침해 있을 여유가 없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환자의 간병과 케어를 위해 또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같은 병동에는 심근경색으로 7년 동안 침대에서 꼼짝 못 하시고 산소 장비와 코 튜브로 연명하고 계시는 분.
20년간 앓고 있는 심한 당뇨병과 그 합병증, 최근에 나타난 치매로 고생하시는 환자분. 폐렴으로 폐기능이 손상된 환자분. 다들 오랜 병원생활을 하신 분들이었다.
그 환자분들 옆에서 계속 간병하시는 가족분들 또는 간병사님들 모두 힘들지만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으셨다. 언제 끝이 날 줄 모르는 간병생활 속에서 다들 자신만의 일을 묵묵히 하고 계셨다. 이분들을 그토록 오래 버티게 만드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입장에서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자연스럽게 형성된 끈끈한 유대감과 간병생활을 같이 이겨내기 위해 서로 힘이 되어 주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분들에 비하면 짧은 병원생활이었고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가족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은 일이든 함께 가족처럼 기뻐해 주고 걱정해주고 응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음식이든 생활용품이든 소소한 뭐든지 함께 나누려는 따뜻한 정도 직접 경험했다.
물론 지치기도 하고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무거운 분위기가 병실에 감돌고 서로 예민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환자에 대한 노심초사 애쓰는 마음을 서로 이해하며, 희망을 잃지 않도록 서로 격려해주기도 하였다.
나 역시 힘든 때도 많았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누군가와 복도에서 부딪히면 „안녕하세요” 하며 항상 밝게 인사를 하였다. 짧은 대화를 할 기회가 있을 때는 희망과 긍정을 북돋아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다.
일이 서툴러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많았다. „걱정 마세요, 누군들 처음부터 잘했을까?”라고 한 분이 귀띔해주셨다. 정말 그렇게 생각을 고쳐 먹으니 그다음부터는 마음이 편해졌다. 간병의 경험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려운 일은 어려운 대로 용감하게 부딪혀가며 모르는 부분은 주위 간병하시는 분들께 도움을 요청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예정된 출국일이 다가왔다.
다행히 아버님의 병환도 빠르게 차도를 보여 정상적인 물리치료 자체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 소식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회복이 아직 안되신 아버님을 두고 한국을 다시 멀리 떠나야 해서 마음이 착잡했는데 말이다.
그동안 병원에서 정든 분들과 며칠간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놀랍게도 몇몇 분들이 유럽에서는 쉽게 구할 수도 없는 것들을 선물로 주시기도 했다.
수년간 병원생활을 해오신 그분들에 비하면 비록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소중한 의미와 함께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새로이 배우게 한 진중한 시간이었다. 결국 아버님이 나를 이렇게까지 성장시키셨구나 라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아버지,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고 사랑해요’
폴란드에서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온 나는, 한국에서 배운 것들을 실천하며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
끝으로 이 글을 빌어서, 병원에 계시는 모든 환자분들 하루라도 빨리 쾌차 회복하시길 기도드린다.
환자 생명의 보전을 위해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시는 의사 선생님들, 간호사 선생님들, 그리고 간병하시는 보호자 가족분들과 간병사님들 모두 모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시는 당신들은 분명히 위대한 분들이다.
모두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