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 Life of Water
벌써 이 동네에 적응을 했다. 생각보다 증류소 투어들이 붐비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고, 걸어서 혹은 멀어봤자 차로 30분 내로 가고 싶은 증류소들을 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아서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식당들도 어차피 몇 개 없어서 수 십 개의 맛집 리스트 중에서 별점과 후기를 살펴보며 선택해야 하는 쓸데없는(?) 고민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여러 모로 마음이 편해졌다.
아주 마음에 드는 도완스호텔은 조식도 한국인 입맛에 아주 잘 맞는 메뉴들이었다. 프렌치토스트와 오믈렛을 먹고, 방에서 오랜만에 음악을 듣고 뒹굴뒹굴 여유를 즐기다가, 점심시간 때가 되어서야 증류소 지도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별 고민 없이 '크라겐모어 증류소(Cragganmore Distillery)'를 찍었다. 디아지오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왕좌의 게임' 에디션으로도 알려져 있고, Old Parr 블렌디드 위스키의 주원료가 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증류소 위스키 대비 친숙하진 않아서 필수코스로 생각해둔 곳은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 가면 딱 좋을 것 같았다.
크라겐모어 증류소로 가는 길, 무계획적인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 그렇듯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스코틀랜드 날씨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운 뭉게구름이 가득한 파란 하늘과 초록색 평원을 만났다.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공간.
크라겐모어 증류소에 도착했을 때, 역시나(?) 관광객은 한 명도 없었고, 운이 좋게도 프라이빗 투어가 자동으로 진행되었다. 스코틀랜드 사투리가 강하게 밴 영어를 천천히 발음해 주는 친절한 가이드와 함께했다. 크라겐모어 증류소는 멕켈란, 글렌리벳, 글렌파클라스 증류소 건립에 참여했던 존 스미스가, 교통의 이점까지 고려하여 설립한 증류소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 워시백을 아직 사용하며, 일반적인 증류기 모양과 다른 증류기를 사용하여 (짧은 목, 그리고 플랫한 탑) 가볍지만 꿀맛과 스파이시함을 모두 담은 크라겐모어만의 맛을 만든다.
그리고, 여느 큰 증류소와 견주어도 될 만큼 아름다운 테이스팅 룸을 가지고 있었다. 구경할 거리가 많은 공간이었고, 특이했던 점은 스페이사이드 동네 증류소들의 위스키를 진열해두고, 테이스팅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는 거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은 증류소들의 위스키였는데, 이렇게 경험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아주 강한 개성들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가볍고 모든 맛들이 적당하게 조화로워 입문자용으로 추천하고 싶은 맛이었다. 크라겐모어는 디스틸러스 에디션, 12년 산을 시음해보았는데, 증류기 설명을 듣고 나서 인지 꿀맛이 강하게 느껴지고, 살짝 피트 처리를 한 보리를 사용해서 연한 피트함의 마무리가 느껴졌다.
편한 소파에 앉아, 붐비지도 않은 증류소에서 가이드와 이런저런 잡담을 하는 소소한 즐거움이 좋았다. 위스키 이름들의 어원인 게일어 퀴즈를 내주었는데 우리가 다 맞추어 버려서 놀래는 가이드의 모습을 보는 것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달까.
SLAINTE MHATH (슬란지바~) : 건배,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한국에서의 동기주처럼 큰 잔에 위스키를 담아 돌아가며 한 모금씩 마시는 전통이 있다.
Craganmmore (크라겐모어) : 큰 돌 (이걸 맞춘 사람은 우리뿐이라고!)
그리고 가이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엄청난 공감을 하며, 크라겐모어 증류소를 나왔다.
위스키는 'Life of Water'라고 생각해요. 위스키가 만들어지는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그렇게 불릴 가치가 있고, 실제로 맛보면 더 공감하지 않아요?
인생이 즐거워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