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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마녀 May 17. 2020

대장정의 시작, 라가불린 16

애주가, 위스키를 만나다 1

위스키 세계로 인도해 준 그와 만남. 


“라가불린 16”

: 모든 것은 이 녀석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아일라 위스키로 스모키한 향 속에 부드러운 쉐리 와인 향이 묻어있다. 해안가에 증류소가 위치한 덕분에 바다내음과 기분 좋은 짠맛도 느껴진다. 상대적으로 다른 아일라 위스키보다는 여성스러운 편. 43%



술을 좋아했고, 누구나 날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애주가’라고 불렀다. 핫플레이스 카페나 레스토랑보다 술집을 데려가 주었고, 밥과 디저트보다 술 메뉴가 더 중요했다. 그랬기에, 내 기억 속 저편에 다양한 위스키 바들과 위스키들이 이미 있었다. 대부분 그 위스키들은 예쁜 커다란 얼음과 함께 있었고, 식도가 타 들어가는 기분을 가져다 줄 뿐이었고, 내가 다시 찾지는 않았었다. (물론 20대의 나는 보통 원샷하거나, 벌컥벌컥 마시는 식감을 즐기는 때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한국에는 위스키 바 대신 선택지가 매우 많기 때문에, 남자친구가(현재 남편) 나에게 위스키를 권했을 때도 여전히 낯설었다.


그를 알게 된 건 대학교 동아리에서였다. 여느 대학생 동아리와는 다르게 본연의 주제도 정말 충실하면서, 서브주제인 ‘술’도 충실한, 지금 생각해도 참 자랑스러운 동아리였다. 대학교 시절의 흔한 인간관계가 그러하듯이 술자리에서 여러 명이 같이 마시며 친해졌고, 술자리 외에서도 사람들이 괜찮아 인생을 함께하는 모임이 되었고, 가까운 친구로서 술자리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이성적 감정 제로의 친구관계로(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가진 둘만의 술자리도 즐거웠던 것 같다. 그날의 술자리는 심지어, 다른 남자와 맥주를 먹다가, 소맥이 먹고 싶어서, 그리고 때마침 연락이 되어서 그를 만난 자리였다. 그는 소맥을 잘 만드는 친구였다. 술자리에서는 늘 재미있었고, 가끔은 진지한 고민상담가이기도 했다. 편하고 꽤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이자카야였다. 바닥에 앉지만, 테이블 밑이 뻥 뚫려 있어서 의자에 앉은 기분이 드는 그런 곳이었다. 그가 만들어준 소맥을 먹으니 몸이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기분이 좋으면 발가락을 움직인다. (그가 발견해준 습관이다.) 그 연장선이었던 것 같다. 그냥 무심코 내 발을 그의 발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그 순간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발 위에 발을 얹는 여자, 사람은 없긴 하지. 그렇게 술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우린 같이 여행을 가고 싶은 곳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여행을 같이 가기 위해선 연애를 시작해야겠다고 했다.

 

그와 연애를 하면서 좋았던 건 역시 첫 번째로 소맥이었다. 데이트를 할 때마다 먹을 수 있던 시원하고 깔끔한 그의 소맥. 그리고 양껏 먹을 수 있는 술의 양. 먹고 싶은 술은 다 시킬 수 있는 즐거움. 그는 술을 정말 잘 먹는다. 웬만한 사람과는 내가 양껏 못 먹는데, 기분 좋게 취할 수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함께라니. 

 

그가 나에게 위스키를 권했다. 그것도 라가불린 16년. 먼저 통화로였던 것 같다.

“너가 좋아할 것 같아.” 

 

나는 꽤 내 세계가 확고하게 잡힌 축에 속한 사람이다. 잘 바뀌지않고, 시그니처라 할만한 특징들이 있다. 그리고 특이한 취향과 감성이 있다. 그는 그 취향을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잘 알아맞히고, 나를 한없이 감성에 젖을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간 위스키 바에서 라가불린 16년을 시키는 그 순간에도 난, 어떤 맛있는 다른 술을 먹을까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내민 잔에서의 달콤한 스모키 향을 맡은 그 순간부터 내 인생에서 ‘위스키’, 그리고 ‘라가불린’은 ‘메인 테마’ 중 한 개가 되었다. 위스키라는 도수가 센 양주를 좋아하게 된 첫 이유는 ‘향’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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