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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마녀 May 23. 2020

아일라 위스키가 좋아요

애주가, 위스키를 만나다 2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현재를 살기를.


라가불린16년의 첫인상은 내가 여태 먹어보았던 술, 위스키와는 매우 달랐다. 유니크한데, 난해하지 않았다. 역시나 내 취향을 잘 아는 그였다. ‘스모키향’이라는 재미있는 차별화 포인트를 가지고 있으면서, ‘아일라 섬에서 생산된 위스키', 그리고 ‘피트로 증류한 위스키’라는 특징으로 심플하게 설명이 된다. 심지어 스모키향은 다양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어서 호기심마저 자극했다. 


라가불린16년은 처음에는 굉장히 남성적인 위스키라고 생각했었지만, 나중에 다른 아일라 위스키랑 비교시음을 해보았을 때 여성성을 숨기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 같은 위스키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프로익10년과 비교시음해보면, 라프로익은 선펀칭을 강하게 때리고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남성적인 느낌이 강했고, 라가불린16년은 오히려 처음에 달달하게 유혹하다가 마지막에 한방을 날려주며 넘어오게 하는 매력적인 여우랄까.(내가 여우라는 건 아니다.) 나는 다양한 스모키향을 접해보려고 노력하고 먹어보았지만, 아직도 나의 최애 아일라 위스키는 라가불린16년이다. 위스키의 첫경험, 나랑 닮은 위스키, 나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위스키, 정말 셀 수 없는 많은 타이틀을 달 수 있기에. 

 

그때부터, 위스키를 갓 마셔본 사람 치고는 특이하게도 어딜 가나 ‘아일라’ 위스키만 찾아댔다. 라가불린 증류소가 있는 지역은 스코틀랜드에서도 아일라라는 섬인데, 그 섬 증류소들은 모두 내가 향에 반해버린 ‘스모키향’을 가장 기본적인 차별화 포인트로 하기 때문이다. 위스키 혹은 싱글몰트 위스키가 좋은 것이 아니라, 아일라 위스키가 좋았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일라 위스키를 찾으면 일단 바텐더 분들이 의아해하며 특별한 취급을 한다. 스모키 향은 보통 여성분들이 안 좋아한다고.(왜 이런 편견이 생긴 건지) 그리고, 영어 철자만 보고는 발음하기 힘든 증류소 이름들을 자유자재로 말하는 건 마치 해리포터가 인간 세계에서 마법세계에 들어와 마법주문을 자유자재로 말하는 것 같이 특별한 기분이 든다. 병들의 모양도 각기 다르고, 라벨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위스키에 관심을 보이면 시작되는 증류소의 이야기들, 위스키의 이야기들이 신화처럼 재미있다. 

 

새로운 멋진 세계에 오자, 예전의 날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리고 미숙하던 나는 위스키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었다. 향을 맡고, 혀를 조금 굴려야 한다는 기본도. 그래서 향을 맡기보다, 높은 알코올을 식도로 느꼈다. 얼음에 담긴 위스키는 그 시절 미숙한 나처럼, 본연의 깊이를 보이지 못하고, 분명 향과 맛을 뿜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술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냥 마시고 취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의 테마로 코로, 눈으로, 귀로, 입으로, 손으로, 머리로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아는 데까지, 누군가를 알게 되기까지 적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한 배움과 기다림 후에 맞게 되는 현재에, 과거를 돌아보면, 내가 오해했던 것들이 무엇이고 진짜 잘못된 것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진짜 나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거에 대해서 알게 된다. 최선이라고, 혹은 하나밖에 없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조금 기다려보면 별로 좋지 않던 선택지였을 뿐이라는 것도 알 수도 있다. 


30대 사람들은 20대를 지나와 많이 기다리고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30대가 시작되면서 인생의 몇 가지에 대해서는 결정이 마무리 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예를 들면, 결혼상대나 직장. 확신이 안 드는데, 타협을 하는 주변 친구들을 많이 본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안될까.


결혼상대에 있어서, 지금 남편을 만나기 전, 나도 타협을 하려 했었다. 하지만 좋은 남편을 만나는 건 내 평생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매년 생일초를 불 때마다 가장 먼저 이 소원을 빌었다.) 조금만, 조금만 하면서 기다렸다. 지금 남편은 나를 위스키뿐 아니라 여러 멋진 세계로 인도해 주는 사람이다. 내 취향에 끼워 맞추거나 취향을 바꾸려 들거나 하지 않고,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나로, 거기서 오히려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맥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만든다. 상대적으로 좋은 남자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아끼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기분을 느끼면 좋겠다. 

 

지금 무엇인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쉽게 타협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면 어떨까. ‘이해 안 되는 지금’이 ‘이해할 수 있는 과거’가 되는 미래를 현재로 살아보는 기분은 꽤나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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