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 위스키를 만나다 3
위스키에 대한 글을 쓸 거라고 하니, 남편은 ‘스모키함에 대해서는 꼭 써야겠네, 네가 또 한 번 그건 써줘야지’라고 말했다. 이 주제는 나의 위스키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고, 소중하고, 중요한 이야기다. 그래서 더 잘 쓰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주제는 이번에 쓰고, 또다시, 자주 쓰게 될 거 같다. 스모키함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엄청 많을뿐더러, 스모키함에 대한 내 느낌과 생각이 자주 바뀐다. 스모키함이라는 것이 오묘하고 복잡하다. 접하면 접할수록 더 많은 걸 느끼게 하고, 또 상황과 내 기분에 따라서도 다르게 다가온다.
스모키함은 정말 신기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청각을 제외하고(나중엔 청각으로까지 느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은 미각, 후각, 시각, 촉각으로 느끼는 것 같다.
스모키함은 ‘피트함’이라고도 많이 한다. 위스키를 만드는 초반단계인 보리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석탄’을 사용한다. 그러나 밀주의 시대에 아일라섬으로까지 숨게 된 증류소들은, 척박한 아일라섬에서 석탄을 구하기 힘들었고 아일라섬에서 자주 보이는 ‘헤더’라는 보라색 꽃을 피우는 식물이 퇴적해서 석탄처럼 변해버린 ‘피트’를 석탄 대신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불을 붙이기 전까지는 아무런 향이 나지 않지만, 불을 붙이면 우리나라의 숯처럼 타면서 스모키향이 난다. 이 향을 보리가 품는 순간, 이 보리는 끝까지 이 향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미각으로 느끼게 되는 스모키함은 호불호가 갈린다. 나 같은 경우에는 처음 접하자마자 아무런 이유 없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사실 불호를 느끼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느끼게 되는지 모르겠다. 피트 향의 위스키를 입에 머금는 순간, 이 스모키함은 아마 그날 위스키 바를 나오기 전까지 입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unepated 위스키를 먼저 먹고, peated 위스키는 마지막에 먹긴 해야 한다. 하지만 아일라 증류소가 아닌 스코틀랜드 본토 증류소들도 약하게 스모키 향을 입힌 peated 컬렉션을 내놓기도 하듯, 나는 일부러 peated 위스키로 먼저 입안에 스모키를 품고, 다른 위스키들을 먹으며 스모키함을 입혀보기도 한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훈연의 맛이라고 하는데, 나는 태운 맛이라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다. (훈연과 태운 맛도 분명 다르지만) 진하고 무거운 맛이다. 맛에서 무게가 느껴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후각으로 연결되는 맛이다. 플로럴/후르츠 계열보다 나무/풀 계열의 향수를 즐겨 쓰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좋아할 향이다. 남편은 어린 시절 할머니 아궁이에서 짚을 태우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향이라서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나는 좀 더 추상적인 것들이 펼쳐진다. 동화 속의 예쁜 집 속, 생각과 감수성이 풍부한 주인공이 좋아하는 다락방 공간 같은 느낌이다. 어둡지만 따뜻하고 진지하지만 재미있는. 나무 계열의 향이 나지만 거친 느낌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만질 수 있다면 부드러우면서 도톰한 오간자 원단의 느낌이다.
사실 그리고, 나는 이제 아일라 섬에서 직접 느낀 오감이 떠오른다. 아일라 섬은 가는 여정부터 멋진 섬이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보통 출발을 한다. 경비행기로 빠르게 가거나, 버스와 페리로 조금 길지만 투어를 하며 갈 수 있다.
경비행기는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겁이 났지만, 다행히 운행 중에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왕복 여정 중 한 번은 편리한 경비행기를 선택했다면, 한 번은 꼭 버스+페리 코스를 선택하길 바란다. 시간은 5배 이상 걸리지만, 글래스고 시내를 지나 하이랜드 투어를 공짜로 하듯이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감상하며 갈 수 있고, 한강 유람선 가격으로 초호화 페리를 타보는 경험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페리에서 보는 바다 풍경도 멋지고,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먹는 학교 식당 스타일로 메뉴를 담는 대로 돈을 내는 식사도 아주아주 맛이 좋다.
그렇게 도착하는 아일라는, 대중교통이나 택시가 전혀 없다. 버스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거의 본 적이 없다. 택시는 아일라 주민에게 개별적으로 전화를 해서(전단지처럼 붙어있고, 관광 팸플릿에 개인번호가 적혀있다) 보통은 그의 시간에 맞추어서 몇 시간을 대기해야 한다. 그가 아이를 보고 있거나,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 수도 있으니!
그리고 정말 3000명도 살지 않는 말이 맞는 것처럼, 위스키를 위한 섬처럼, 큰 증류소 중심으로 작은 마을이 있고, 그 외에는 아름다운 들판과 바다뿐이다. 섬을 통틀어 약국과 병원이 한 개뿐이고, 레스토랑이 예고 없이 문을 닫았기에 물어보면 ‘여긴 아일라인걸’이란 대답이 돌아오는 곳이다.
의식주의 고민이 심플해진다. 대형 증류소 근처에 호텔이 있긴 하지만, 몇 안 되는 에어비앤비가 아주 멋있는 뷰에 단독 집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기에 더 낫다. 동네마다 레스토랑 자체가 많아야 2~3개이기 때문에 매끼 돌아가면서 먹다 보면 모든 레스토랑을 갈 수가 있다.
그리고, 모든 곳에 위스키가 있다. 어느 에어비엔비를 가도, 위스키 관련된 것들을 만날 수 있다. 내가 묵었던 곳은 피트를 직접 난로에 태워볼 수 있었다. 또 어느 작은 동네 레스토랑을 가도, 다양한 위스키를, 한국의 위스키 바에서 한창 아는 체를 해야 바텐더가 꺼내올 것 같은 위스키를, 1/3 가격 정도에 맥주 시키듯이 시킬 수 있다.
아일라, 스모키함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모든 여정과 섬의 모습을 담았을 테니 말이다. 위스키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면 휴가 때 아일라에서 보내기를 꼭 권한다. 쓸데없는 의식주에 대한 고민이나 여행루트에 대한 고민 없이, 강제적으로라도(?) 온전히 위스키로 취하고 좋은 자연을 보며 다시 술이 깨는 행복한 휴가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