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부모님 그리고 친구들.
나에게 있어 관계 불안을 느꼈던 처음의 기억은 6살, 엄마와 아빠가 이혼도장을 찍자고 나와 오빠 앞에서 다툼을 하던 그때부터였다.
(물론 더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혼 도장 찍어! 찍자고!!”
“그래 당장 서류 챙겨 와 내일!”
엄마, 아빠가 피가 튀길 정도로 싸울 때면, 나는 방에 들어가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이 된 것처럼 혼자 드라마와 뮤직비디오를 찍곤 했다.
다시 말해 다툼이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드라마 혹은 뮤지컬을 찍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내 역할은 부모님이 싸워서 힘겨워하고 부모님이 곧 헤어져야 해서 모든 가정을 먹여 살려야 하는 희생적인 어떤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노래도 가끔 불렀다. 최대한 처량하고 슬픈 노래를 만들어 불러야 했다. 그래야만 현재 벌어지는 이 아픔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
되돌아 생각해보면, 그렇게 해서라도 어린아이가 겪어야 했던 아픔과 상처들을 경감시키기 위해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어간 게 아닌가 싶다.
차라리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두 분이 헤어지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가정을 지켜오신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 어릴 적 헤어졌더라면 또 다른 그와 관련된 트라우마와 상처들이 남아 있었겠지.
그런데 만약 깔끔하게 이혼을 했었더라면, 헤어지더라도 ‘나는 너의 부모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변함이 없다.’ 하며 부모님의 각자의 인생을 사셨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커서 참 많이 했다.
오히려 관계 불안, 유기 불안을 느끼지 않기 위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그래서 오랜 세월 이렇게 몸, 마음, 영혼이 파멸에 이르기까지의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뿌리 깊게 ‘관계’라는 단어만 들어도 여전히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말이다.
오늘은 사이가 너무 좋아도 당장에 내일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매일을 시달려야만 했다.
언젠가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 곁을 떠날 거라는, 나와 오빠를 버리고 갈 거라는.
하지만 그 날이 올지 아니면 온다면 언제일지 모른다는,
절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그 전전긍긍함을 그 불안감을
번갈아가면서 가출을 하셨던 부모님 사이에서 느껴야만 했다.
그 당시, 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 아빠를 위해 기도 하는 것이었다. 6살의 아이의 살아가는 희망이자 유일한 꿈은 ‘엄마 아빠가 안 싸우고 우리 가족이 행복’ 해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엄마 아빠가 제발 싸우지 않게 해 주세요.”
참 웃기게도 이런 기도가 고스란히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하게 되었다.
다만 기도하는 대상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부모님과 더불어 친구에 대한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친구와 오늘 싸우지 않게 해 주시고 친구가 기분이 상하지 않아서 저와 말도 많이 하고 웃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매일 학교 가는 길에 그렇게 기도했다. 샤워하고 양치하듯이 학교 가는 길에 꼭 하게되는 하나의 의례와 같은 일이었다.
그 기억들은 잊을 수가 없다. 매일 학교를 가는 그 길, 내 눈엔 어둡게만 보였던, 추웠던 그 길.
마음은 늘 천둥이 치는 듯했고 쿵쾅거리는 심장소리 속에서 두려움이라는 번개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집에서는 부모님의 기분 특히 엄마 기분을 살폈고 학교에서는 친구의 기분을 살피기 시작했다.
친구가 기분이 나 때문이건, 누구 때문이 건 아니면 그냥 표정이 안 좋아 보이든 간에 조금이라도 친구의 감정선이 서늘해 보이는 것 같은 날에는
무조건 어떠한 근거도, 합리적인 타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 때문에 친구가 기분이 상한 거다.’라고 생각하고 모질고도 질기도록 지금까지 쫓아다니고 있는 ‘죄책감(gulity)’를 극심하게 가져야만 했다.
(실제로 그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친구 기분을 어떻게 서든 풀어주려고 무진장 애를 썼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했던 것이 ‘쪽지’를 쓰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말로 표현하고 나서 다가올 친구들의 반응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인데 날 거절해버리고 쌩~ 하고 떠나버릴 것 같은 친구들.
그 차가운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 감당하기 제일 두려운 문제였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도 않은데 미안할 거리를 만들어서 실제로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xx야. 내가 너한테 ~해서 기분이 상한 거 같아. 정말 미안해. 한 번만 용서해줘.”라고 쪽지를 썼다.
만약 친구가 나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이 확실하다면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머릿속에서 ‘어떻게 하면 기분이 풀어질까.’를 하루 종일 생각한다.
그 어떤 것도 집중하기 어려워졌고 늘 머리가 아프고 둥둥 떠다니며 하늘 위를 걸어 다니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 쪽지를 쓰건, 혹은 어떤 일에 의해서 건 어떠한 이유로 인해 친구 기분이 풀리게 되어 조금이라도 나에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 보여준다면 그전까지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모든 무거웠던 짐들과 실타래들 그리고 심장을 꽉 묶고 있었던 압박붕대 같은 것이 확 풀어헤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 나에게 이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이다.
학창 시절 내내 여러 번의 왕따와 소외감 속에 지내다 보니 나의 의견을 얘기하는 것보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고 다 맞다고 해주고, 잘 웃어주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대부분 착하다고 함께 놀아주었고 이러한 가면을 활용하는 이 방법만이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또한 친구가 나를 떠나게 하지 않게 하도록 하기 위한 관계의 수단으로 머리와 가슴속에 깊숙하게 새기게 되었다.
‘아. 그냥 다 맞다고 웃어주고 하자는 대로 하면 되는구나.’
내가 이렇게만 한다면 그 누구도 나를 떠나는 사람이 없을 것 만 같았다.
나를 모두가 거절하는 사람은 없을 것 만 같았다.
모두가 나를 사랑해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나를 부인해갔다.
나를 부정해갔다.
나를 잃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