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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Jun 03. 2020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여행의 이유, 김영하, 문학동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알쓸신잡이 막 끝났을 무렵 즈음 인가, 작가님이 회사에 강연을 하러 왔다. 강연 내용 대부분은 프로그램에 나왔던 이야기였음에도 현장에서 들으니 또 그렇게나 새로웠다. 이것이 작가의 힘이구나!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며 계단식강의실에 앉아 감탄하던 그 때가 생각났다.


어딘가에서 휴대전화 벨이 울리고(늘 그렇듯, 당당히 통화한다. 놀랍게도 이런 진절머리 나는 일에 익숙해졌다), 내 앞 줄에 앉은 이는 사정 없이 졸고 있고, 옆 옆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네이버 기사를 읽고 있는(분명 강연은 뒷전이고 강연 후 나눠주는 샌드위치 때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환멸나는 상황에서도 귀에 쭉쭉 꽂히던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감탄하던 그 때가 생각났다.


제목만 보고 여행기를 담은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유를 담은 책이다. 본인의 취향과 생각 조각들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깊게 파고들어간다. 몇 번이나 이것이 작가의 힘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한다.


" '15소년 표류기'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책이었고 이 책들을 닳도록 읽었다. ... 일 년에 한 번꼴로 낯선 도시로 이주하고 새로운 학교로 전학하는 상황에서 내가 그럭저럭 멀쩡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은 아마도 이런 책들의 힘이었을 것이다"


작가님이 좋아했다던 15소년 표류기를 처음 읽은 날을 기억한다.


11살 때 였는데, 아빠가 퇴근길에 가져다주신 책을 바닥에 엎드린 채 읽기 시작했다. 어깨와 목은 뻐근하고 눈은 사정없이 따끔거리는데 잠들어야하는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읽고도 아쉬워서 쉽게 덮지 못했다.


15소년 표류기 말고도, 표지까지 정확히 기억나는 내 어린시절의 책들-핵 전쟁 뒤의 아이들, 노인과 바다, 찰리와 초콜릿공장, 마녀가 우글우글, 마틸다,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 같은 로얼드 달의 거의 모든 동화-은 전부 모험을 하는 이야기들이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늘 무언가에 갇혀 있는 것 같았고, 하루 하루를 그저 견뎌내야 하는 것 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이 책들을 읽을 때 만큼은 나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빠져들 수 있었다. 이들은 나의 숨구멍이고 호흡기였다. 저들이 모험을 하면 나도 모험을 하는 것 같았고, 이 답답함을 잘 견디고 있으면 도움의 손길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손길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기에는 많이 어렸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이,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혼자 여행을 할 때 마다 평소에는 쓰지 않던 일기를 그렇게나 열심히 썼다. 중앙선 개념도 없이 질주해대는 야간 버스에서도 쓰고 바퀴벌레가 스물스물 기어다니는 기차 구석에서도 쓰고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을 넋놓고 구경하던 카페에서도 썼다. 순간 순간 떠오르는 생각들과 감상을 정말 열심히도 휘갈겨 썼다. 집에 돌아오면 한동안 거들떠도 안 보다가 사진첩이라도 좀 만들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때에야 들춰보았다.


아무도 나를 인식하지 않고 나도 모두를 인식하지 않는 그런 곳에서만 나에게 관심을 가졌다. 평소에도 그랬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지금의 내가 조금은 더 편한 마음일텐데.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다.


어찌된 게 요즘은 책을 읽을 때 마다 결론이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다'가 되는지.

버석버석 마른 잎사귀 같던 내가 물을 조금씩 머금으며 이제서야 살아나고 있는 기분이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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