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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Aug 30. 2020

나의 무지와 공황장애


신경정신과에 처음 간 날. 한 환자가 진료실을 나오고 곧 내 차례구나 하는 걸 인지한 순간부터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회사 상사에게 내 상황을 이야기하고 쉬겠다는 의사를 전할 때도 엄청난 현기증이 나서 사무실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나의 심장은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못할 만큼 오래전부터 매우 자주 그렇게 뛰었다.

식은땀이 나고 어지럽고 구토를 할 것 같고 손이 떨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증상도 함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릴 때부터 계단을 오를 때면 꼭 손잡이가 필요했고, 손잡이를 잡았어도 뒤로 굴러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숨을 잘 못 쉬었다.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는 지금도 좀 두렵다)

유치원에서 매 방학 시작마다 꼭 갔었던 2박 3일 캠프 때나, 격일로 있었던 것 같은 체육시간에는 어딘가를 크게 다칠 것 같은 느낌에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서울로 이사 온 초등학생 때부터는 버스만 타면 버스가 전복되서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이라 좀 돌아가게 되더라도 지하철을 선호했다.

밤에 어딘가에서 쿵 하는 소리만 들려도 전쟁이 일어나서 당장이라도 핵폭탄이 터져 내가 녹아버릴 것 같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이 공황 증상이라는 걸 몰랐다.

아마 그때는 아무도 몰랐을 거다. 누군가에게 말한 적도 없지만, 말했어도 애가 공상이 심하구나-하고 생각했겠지.


작년 여름, 상담을 시작하면서 선생님이 공황 증상들에 대해 처음 알려주셨을 때에도 긴가민가했다.


회의 때마다 숨이 막히고 구토할 것 같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이게 공황이라고? 연예인들이 예능에서 떠드는 그 병?

거의 잠든 상태에서도 고속버스가 커브를 돌거나 차선변경 하는 것이 인지되면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식은땀나고 숨이 가빠지는데 이게 병이라고? 7년 동안 주말마다 매번 그랬는데? 에이 설마.



공황장애 증상과 체크리스트들을 찾아보고는 웃었다.

아니, 지구상에 이렇지 않은 사람도 있단 말이야?


병원에 처음 간 날. 대기실에 앉아 상태 체크를 위해 준 설문지에 답변을 하며 의아해했다.

3점이 만점이라니? 당연히 대부분 3점인데. 10점 척도 정도로 나눠야 좀 정확한 것 아닌가? 여기에 0점 체크하는 사람이 있어?


문항의 의미가 이해 안 가는 것들은 번호 옆에 ? 표시를 해 두었다.

설문지를 제출하자 간호사가 ? 는 뭐에요? 라고 물었다. 의미를 잘 모르겠는거요. 하고 답했다. 진짜 모르겠어서 그랬다.

예를 들어, 예민하게 반응한다.(민감이었나? 뭐 아무튼) 같은 질문. 나는 '대체 예민의 정의가 뭐지. 뭐가 예민한거고 안 예민한거지. 그걸 일일이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있나. 오늘은 내가 예민하구나. 하고 안다는 말인가? 하는 류의 생각들을 짧은 시간에 휘리릭 하고는 도저히 모르겠는 것은 물음표를 붙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아마 '이 환자 중증이네' 하고 생각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 물어도 다들 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니까.


내 설문 결과를 보고 의사는 놀란 표정이었다. 역시나 ?에 대해 물었고 나는 또 답했다. 의미를 모르겠는 거요.

'예를 들어 이런 상황에 이러이러하게 반응하는 거에요' 라는 식으로 쉽게 설명해주길래 '아 그럼 그 문항도 3점이에요' 라고 답했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아마 모든 문항에 대해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일주일에 한 번, 의사와 만나는 30분이 정말 간절할 수도 있는 내 뒷 순서의 환자를 생각하며 묻지 않았다.


60 몇 점 만점에 30 몇 점 이상이면 심한 공황장애인데 나는 이미 50점을 훌쩍 넘겼다고 했다.

증상의 강도를 잘 모르겠어서 2점에 답한 것들도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 3점이니 어쩌면 만점일 수도 있었다. (만점이 나왔다면 의사 표정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웃기네)


그럴 리 없다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가 말했다.

에에에? 제가요? 에에에?

의사는 웃지 않았다.

네. 이 지경까지 약을 안 드신 게 신기하네요.



세 종류의 약 처방을 받았다.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들었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하는 류의 말들이라 홀랑 까먹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어서 기록을 할 수 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기억했다. '이번 주 할 일은 그저 일주일 동안 약을 꾸준히 먹어보는 거에요.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구요. 다음주에 꼭 봅시다'


아, 나 진짜 아픈거구나. 내가 진짜 아픈거구나. 정신과 의사가 나를 매주 보고 싶어 할 만큼 아픈거였구나.


약을 받아 들고 길 건너에 있는 롯본에 갔다. (직장인이 바글바글한 동네에 있는 병원을 일부러 찾기도 했지만, 제일 좋아하는 동네 한복판에 있다는 것도 선택하는데 중요한 요소였다)

평소 같았으면 신나게 돌아다녔을 텐데 이상하게 기운이 없었다.


집에 가봤자 퇴근 시간이라 엄청 붐비고 막힐 거라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고 가야하는데 정말이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금요일 6시 퇴근을 지켜내고 집으로 와랄랄라 향하는 을지로와 광화문 직장인들 사이를 뚫고 집에 갈 용기도 없었다.

자라 피팅룸에 들어가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옷을 입어보고, 다음 정기 세일을 떠올리며 자라 어플 위시리스트에 넣어 두었다)


멍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 약 부작용을 찾아보다 공황장애 카페에 가입했다.


상담선생님이 '그거 공황장애 증상이에요'라고 말했을 때와 의사가 '중증의 공황장애'라고 진단을 내렸을 때 받은 충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정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세가 시작하자마자 놀라서 심장 검사를 했고 흘러흘러 정신과에서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이상 증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다들 정말 면밀하게 캐치하고 있었다.



아.

너무나 오랫동안 무지했고 무식했다.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어릴 때의 여러 기억 속 가해자들에게 화가 났고, 평생을 불안하면서 불안한 줄도 몰랐던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아마 내가 오랜 기간 생각하고 보듬으며 풀어야 하는 문제겠지.


그래도 이제는 내 몸이 보내는 반응들이 '너 지금 아파. 제발 좀 쉬어' 하고 말해주는 사인인 걸 안다.

불안을 감추려 기를 쓰고 눌러놓았고, 그러다 익숙해져 버려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수많은 반응들이 고맙다.



무엇보다 현명한 내가 무지하고 무식한 나를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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