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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Nov 09. 2020

상한 귤 하나와 마음 한 조각

극조생귤이 나오기 시작한 10월부터 매일 귤을 먹고 있다. 오일장에서도 사고 당근마켓에서도 사고 운전하고 지나가다 보이는 농원에 들러서도 사고 부지런히 사다 먹는다.


매일 수북이 쌓이는 귤껍질은 베란다에서 말린다. 귤피차라던가 뱅쇼라던가 뭐 그런 걸로 활용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쓰레기봉투에 넣으면 왠지 바퀴든 날파리든 성가신 벌레를 불러 모을 것 같아서다. 바람이 매서운 동쪽 동네에서 펼쳐두고 말리다가는 모두 날아가 버릴 수 있어서 적당히 큰 비닐에 넣어두고 말린다.


껍질들이 온전히 마르고 있는 곳에 약간 상한 귤을 같이 두었다. 무른 부분 한두 쪽 떼어내고 그냥 먹어도 될 수준의 귤이었지만 귤 인심 후한 이곳에서 굳이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무지한 인간은 그 작은 귤도 적당히 마를 거라고 생각했다.


이틀도 지나지 않아 곰팡이 대잔치가 열렸다. 깨끗한 껍질만 모아두면 바짝바짝 잘 마르는데 이번에는 상한 귤 주변까지 전부 퍼렇고 허연 곰팡이로 뒤덮였다.


고작 귤 하나였는데.

미미한 흠집이 있는, 어린아이도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크기의 작은 귤 하나.


곰팡이를 옴팡 뒤집어쓴 작은 귤과 껍질들을 보며 생각했다.


내 마음 같다.


상한 마음 한 조각 한 조각이 여기저기서 곰팡이를 피워내고 내 마음 전체를 뒤집어 삼켰다. 상한 마음이 있는지도 모른 채,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꽁꽁 숨겨두고 없는 척 지내온 오랜 기간 동안 야금야금 몸집을 불린 조각들이 이제는 전체가 되어버렸다.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비닐을 꽁꽁 싸매며 생각했다.


상한 귤은 버리면 되지만, 내 마음은 버릴 수가 없다. 

상한 조각들 전부 알아봐 주고 빛을 보여주어 온전한 삶의 기억으로 남을 때까지 온전히 이 시간을 누리자. 

조급해하지 말자. 언제 괜찮아질 거냐고 다그치지 말자. 

앞으로 매일 생길 크고 작은 상한 마음들을 그때그때 어루만질 수 있는 면역과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자.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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