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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Jun 03. 2020

오뎅보다 맛있는 글

일간 이슬아 수필집 2018, 이슬아, 헤엄 출판사

"내 글 한 편은 포장마차에서 파는 계란빵보다 싸고 오뎅 한 꼬치보다 싸다. 오뎅보다 맛있는 글을 쓰기란 쉽지 않지만 재고가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디지털 메일링이 무조건 고맙다"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인스타에 자주 등장하던 이름, 책읽아웃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귀에 자주 들리던 이름. 본인의 글을 '매일' 발송하는 '구독 서비스'를 몇 년 전 부터 해왔다는 그 이슬아


세종국립도서관장서 200권의 책이 대전과 세종에 있는 이 기관 저 기관을 돌며 온다. 입사 초반, 역학이 어쩌구, 재료노화가 어쩌구 뭐 이런 류의 책만 가득한 회사도서관에 실망해 발길을 거의 끊었었는데 몇 년 전부터 두 달에 한 번 씩 새롭게 오는 세종도서 덕분에 2주에 한 번은 간다.


세종도서는 회사도서관 내에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에 ㅁ자로 배치되어 있다. 천천히 ㅁ자로 걸음을 만들다가 사전 처럼 두꺼운 수필집이 빛을 받으며 해사하게 있는 것을 보고, 짧은 머리의 이슬아 작가가 표지에 있는 것을 보고, 도서관에서 박수를 칠 뻔 했다.


매일 잠들기 전 아껴 읽었다. 일이 너무 많아 사무실에서 뇌가 쉴 틈을 안 주는 지금, 왼쪽 광배근과 승모근은 잔뜩 뭉치고, 방사통으로 손가락 끝까지 저릿저릿한 지금, 아 그래 이런 세상도 있지, 아 그래 이런 사고도 있지, 하며 아껴 읽었다.


이렇게 찔끔찔끔 읽다가는 대출기간 내에 다 못 읽겠다 싶었는데, 달력에 적어 둔 당직 일정을 보고 안도했다. 근무 7년 차에 처음으로 하는 주말 일직이자 (아마도)마지막이 될 이 시간 동안 나는 이슬아를 탐구했다. 고오맙다 회사여 이렇게 알맞은 타이밍에 당직 일정을 주고.


하필 이 날이 무슨 훈련을 하는 날이라 바로 옆 상황실에서는 '행동이상자 어쩌구 무기고 앞으로 저쩌구 이것은 훈련상황입니다' 같은 시끄러운 시뮬레이션을 계속해서 하고 있고 나는 그 소리들을 재즈 삼아 책을 꼭꼭 씹어 읽었다.



"엄마. 알아둘 게 있어. 엄마는 약간 불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뭔가를 알아둬야 한다고 말할 땐 이미 마음을 굳혔으며 누가 아무리 나무라도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상태라는 걸 엄마는 알기 때문이었다. 뭔데? 나는 피아노 안 해. 엄마는 눈치를 살폈다. 내 눈치가 아니라 옆방에서 자고 계신 할아버지가 들을까 봐 눈치를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피아노를 배우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할아버지가 피아노 치는 내 미래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간이 콩알만 해졌던 것이다.


... 이슬아! 그럼 나는 그 앞에 가서 앉아야 했다. 그럼 할아버지는 나를 한참 본 뒤 내게 말했다. 배신자... 여느 때처럼 나는 그가 술 마시는 걸 쳐다보았다. 그의 기대에 충족하지 않을 때의 쾌감은 아주 불안하고도 짜릿한 것이었다"


8살의 그녀는 하기 싫은 것은 하기 싫다고 말할 줄 아는 아이였다. 부모가 시키면 해야하는 거고 그게 좋은거고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굳게 믿고 쭉 살아온 나는 이 대목에서 억울해서 광광 거렸고, 마음이 미어졌고,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결국 내 선택이었다는 것이 항상 가장 억울하지만, 그것도 나의 일부이고 앞으로도 쭉 내가 감당해야 할 숙제다.


"정조를 기준으로 30분 전에 입수해서 30분 후에 나오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노동 조건상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웅이를 비롯한 잠수사들은 정조 앞뒤로  2시간, 그러니까 4시간 이상 물에 들어가 일했다. 어느 날, 웅이의 잠수 도중 작업선의 공기 컴프레서가 툭 하고 빠져버렸다. 여느 때처럼 탁하고 깊은 물속에서 일하던 웅이에게 공기가 중단되었다. ... 웅이가 잠수 일을 그만두고 1년 사이에 정확히 그가 일하던 자리에서 두 명의 잠수사가 목숨을 잃었다" 


시야가 확 트인 바다에서 그저 즐거움을 위한 다이빙을 할 때에도 가끔 두려움이 몰려 올 때가 있다. 공기압력 게이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인지, 내 다이빙 컴퓨터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갑자기 어마어마한 조류가 몰려와서 나를 저 어둠 속으로 끌고 가면 어쩌지와 같은 망상에서 시작되는 두려움. 그런데 발전소 밑이라니. 교각 아래라니. 대체 눈 앞에 뭐가 보이기는 하는 것이며 수온은 또 얼마나 낮을 것이며, 그 와중에 공구를 들고 일을 해야 하다니,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두려움이다.


산업잠수사였던 그녀의 아빠 일을 이야기 하는데 숨이 턱 막혀왔다. 아무렇지 않게 매일 건너다니는 한강의 다리들, 공기처럼 당연스럽게 사용하는 전기들, 지금 내가 있는 이 건물들 하나 하나 누군가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누군가의 말도 안되는 희생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 시대의 편리함이란 그런 것이다. 하루만에 택배를 받고, 새벽마다 식재료를 문 앞에서 들이고, 밤 중에 떡볶이가 먹고 싶으면 버튼만 누르면 되는 이 편리함은 말도 안되게 적은 비용과 그 비용에 기대어 있는 노동력으로 갖게 된 것이다. 이건 뭔가 불공평하다.


당연히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 사람을 갉아먹으며 누리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마음과 이를 표현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내 일에만 내 회사에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요구해야 한다.


이런 생각까지 느닷없이 후루룩 하게 해주는 이 글은 대체 뭔가! 오뎅 한 꼬치 보다 싼 글이라는 게 말이 되나.


"집에 돌아와 루프 시술에 관해 공부해보고 여러 후기들을 읽어 보았다. 복희와 웅이와 애인과 이야기를 충분히 나눠본 뒤 시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부모를 복희와 웅이라고 적을 수 있는 딸. 딸의 피임법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하는 부모라니. 각각 하나의 개체로 독립된 사람들이니 가능하겠지. 나는 앞으로 나의 부모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한다. 정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는 것, 부모를 하나의 개체로 보는 것, 어렵다. 사춘기도 아니고 이제와서야 하려니 이렇게나 어렵다.


"생리 중에 괜히 말을 거는 건 내가 걔한테 종종 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늘 둘 다 자궁과 난소가 거사를 치르느라 일상이 조금 번거로웠다"


 글을 읽는 나의 자궁도 거사를 치르는 중이었다. 당직 날짜를 보고, 주기를 따져보고는  주기가 하루라도 늦어지면 절대 안되는데 하고 전전긍긍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생리통 때문에 당직을 째버린 인간이 되었겠지. 생리는  번거롭다. 다행히 아무 통증도 없는 3일째 이지만, 여전히 번거롭고 부산스럽다. 아침에 오자마자 당직 의무인 순찰이  시에 있는지 부터 확인하고는 ' 그럼 순찰     화장실에 들르면 되겠다' 생각했다.  이런  따위를 계획해야 하는가. 그것도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머리가 자동으로. 내가 남자였으면 그저 ' 시쯤 간식을 먹으면 되겠군' 따위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성별과 나이와 직업과 사는 곳에 따라 조금씩 다른 말투를 사용한다고 느꼈다. 그중에서 나는 의사와 간호사 모두에게 얼렁뚱땅 반말로만 이야기를 듣는 20대 중반 마포구 거주 여성이었다. ... 찬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린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에게는 어쩐지 존댓말을 할 때가 더 많았다. 그의 팔뚝과 가슴을 가득 채운 문신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의 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가 남자이기 때문일지도 혹은 나보다 말수가 적어 보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3월 마지막주 인데도 손이 시려워 호호 불어야 하는 넓고 휑한 당직실에서 몇 번이고 울컥하고 눈물이 차올라 책을 덮고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려가며 85편의 수필을 다 읽었다.


반투명 유리벽 건너 상황실에서는 나보다 10살은 더 어린 신입사원과 나보다 20살은 더 많은 이들의 이상한 대화-김치냉장고와 식탁 위치, 전기세와 조명, 대전에 새로 나온 확진자와 지난 주 확인한 인사평가 결과-뭐 이런 영양가 하나도 없는 대화가 시끄럽게 계속되었다. '내가 엉엉 울어버리면 저 분들이 너무 당황하겠지, 어쩌면 아 이래서 여자들은 일직 시키면 안되-라고 수군거릴 지도 몰라.' 나를 다독여가며 읽었다.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그녀가 내 앞에 있는 것 같다. 누군가의 인생을 잠깐이지만 샅샅이 들여다 본 느낌이다. 그녀가 이렇게 매일을 기록하는 동안 나는 어떤 2018년을 보냈는가. 기억도 나지 않네.   



"가장 소중한 이야기들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그걸 안 썼고 앞으로도 안 쓸 것이기 때문에 나는 무사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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