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의 이너콘서트 Dec 04. 2020

팩트체크의 함정

역사의 역사 / 유시민

몇 년 전부터 JTBC 뉴스에서 팩트체크라는 코너를 운영하면서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팩트체크라는 말이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는 것이 뉴스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몇 가지 사실관계를 확인했다고 해서 어떤 문제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얻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인터넷에 떠도는 너무나 많은 정보로 인해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렇게 정보가 많을 때 인간은 각자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사실을 기반으로 써졌다고 그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역사는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편집되거나 새로운 권력과 시대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써졌다. 뉴라이트의 국정교과서 이슈도 들여다보면 사실관계를 놓고 누가 더 사실을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의 논쟁인 것 같지만 핵심은 "왜 그렇게 이야기하려는가?"이다.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History of Writing History)를 읽으면서 작가도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역사'는 2,500년 전의 역사가로부터 근대의 역사가들까지 그들은 어떤 목적과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비교했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너무 어려워할지 모를 일반인들을 위해 어려운 부분은 쉬운 말로 다시 설명해 주기도 하고, 어떤 책은 너무 어려우니 굳이 직접 읽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다.


유시민 작가는 학문으로서의 역사학과 예술로서의 역사 서술을 구분하면서 책에 소개된 역사책들은 '서사(Narration)'를 담고 있는 역사서라고 정의했다.


"역사가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역사에 대한 도덕적 감정을 텍스트에 투사하며, 독자들은 그 감정을 느낀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격렬한 감정 표출을 동반한 '역사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러 역사가들의 책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중 우리에게 익숙한 일제 강점기 시대의 역사가들의 사례를 조금 소개해 볼까 한다.


그 당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목표는 조선 사람의 각성과 단결을 촉진하고 항일 투쟁을 북돋우려는데 있었다. 이런 소망을 가진 역사학자들은 자신의 역사 서술에 민족을 주인공으로 삼아 과거를 재구성하고 도덕적 감정을 투사하게 된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역사가들은 주로 세 가지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다.


1. 민족해방 투쟁의 정당성 입증을 위해 일제의 불법적, 폭력적인 조선 강점 과정과

    조선 사람들이 벌인 해방 투쟁을 세세히 기록 (박은식 '한국통사')

2. 조선 사람들이 민족적 자부심과 자주성을 북돋우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과거 역사를 재구성/재해석 (신채호 '조선 상고사')

3.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해 열등하지 않으며, 우리 사회와 역사가 스스로 발전할 수

    없는 결함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 (백남운의 조선 역사 4단계 발전론)


특히 박은식의 사례는 그의 저작을 통해, 초기 개명 유학자에서 민족주의자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한국통사'에서는 사마천 이후 중국 문명권에 뿌리내린 조선의 전통을 답습해 객관적 사실 기록과 주관적인 해석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쓸 때에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투사가 되어 있었다.


두 책에 쓰인 서술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뚜렷한데, 우선 '한국통사'에서 동학혁명에 대해 설명할 때는 백성을 탓하지 않고 정부를 비판했으나 조선의 신분 제도는 받아들인 듯한 태도를 보였다.


"갑오동학란은 그 허물이 백성이 아니라 정부에 있다는 것은 천하가 모두 아는 바이다.... 우리 백성은 윤리를 돈독히 지키며 질서에 순응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복종하고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에 굴복하는 것을 하늘의 도리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그 어조가 완전히 달려졌다.


"그들을 분기하게 만든 동력은 양반의 압제와 관리의 탐학이었다. 그러니 우리나라 평민의 혁명이다."


이처럼 역사가들의 생각은 그들의 역사 저술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 물론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경우는 일제 강점기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투쟁을 위한 목적성이 더 뚜렷이 보이는 이유도 있겠으나 일반적인 역사 서술에도 그 시대 상황과 역사가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역사가의 의도가 담기게 되는 것이다. 유시민 작가는 이런 사실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모든 역사가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 역사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추적하지만 흘러가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사건과 함께 흘러가며, 그렇게 흘러가는 동안 역사가의 생각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팩트체크의 시대에, 단순히 팩트의 나열은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에서 추천해주는 내 '입맛'에 맞는 사실들만 받아먹다 보면 우리는 생각의 힘을 잃고 스스로 세뇌당하거나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다. 팩트의 나열을 넘어 '서사(Narration)에 어떤 배경과 논리가 적용되어 있는지를 잘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연은 왜 자살을 택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