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표백' / 장강명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중략)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그런 내 처지를 가만히 생각할 때면 식당에서 키우는 개가 생각났다. 손님들마다 한 번씩 쓰다듬고 목을 만지고 지나가는데, 정작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피곤한 개 말이다. 사람 손을 탈 대로 타서 이제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손님이 귀찮기만 하지만 손님에게 짖거나 손님을 물었다간 주인에게 맞는다. 손님이 자기 꼬리를 만지든 불알을 만지든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다. 그런 예속된 삶. 식민지 백성의 삶.
우리 사회에 모순이 쌓이지 않는다는 세연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있다.(중략)
아마 나는 그때 웹사이트를 하나 만들 수 있으리라. 그 웹사이트에 와이두유리브닷컴(whydoyoulive.com)에 대한 대답으로 디스이즈더리즌닷컴(thisisthereason.com)과 같은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문명의 충돌 / 새뮤얼 헌팅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