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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29. 2020

세연은 왜 자살을 택했나

소설 '표백' / 장강명

이삼십 대들이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들린다. 이 책이 나온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뭐 하나 달라진 건 없다. 오히려 그 사이 이삼십 대의 경제적 빈곤과 좌절은 단순한 사회문제를 넘어 세대 간의 갈등이 되고 정치적 갈등으로 심화되고 있다.


소설 속 정세연이라는 인물은 누가 봐도 첫눈에 반할만한 예쁜 얼굴에  공부도 잘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도발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게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났으나 이 세상은 더 이상 발전할 것도, 바꿀 것도 없다고 믿는 지독한 회의주의자이며, 자신은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구조에 묶여 '위대한 일'을 할 수도 없다고 개탄했다.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중략)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이 사회에 대한 어설픈 저항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세연은 '자살'을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한다. 목숨을 끊는 정도의 충격이 아니고선 바뀌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자살이 사회적 저항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삶을 비관한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그래서 누가 봐도 부러워할 상황 - 이를 테면 최고의 학점에 대기업까지 합격한 상태- 에서 자살을 계획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연쇄적인 자살이 있어야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예수의 제자들처럼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4명의 친구들에게 자살을 종용한다. 세연은 이들 4명이 본인이 죽은 뒤에 각자 자발적으로 자살을 하도록 특수한 상황으로 이들을 몰아넣는다.


책을 보면서 예전 유나바머(Unabomber)라고 불리던 테러리스트 카진스키가 생각났다.


이 사건은 1978년부터 미국 전역에 소포로 위장되어 배달된 폭발물로 인해 3명이 사망하고 26명 부상을 당한 사건이다. 수취인은 교수나 항공사 임원 등으로 범행 동기나 피해자의 연관성 없어 18년 동안이나 범인의 흔적이 밝혀지지 않았다. FBI는 범인을 University-and-Airline Bomber를 줄여 Unabomber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카진스키는 후에 자신의 범행 동기를 3만 5천 단어, 52 페이지에 달하는 혁명 선언문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세상에 발표하는데 그 글의 문체를 보고 형이라는 것을 직감한 동생의 제보로 1996년 체포되었다.


그는 하버드 수학과를 졸업한 천재 수학자였으며,  고도로 발달한 기술문명이 인간을 좌절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여, 교수 생활을 접고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몬타나주 숲 속의 오두막에서 30년간 홀로 생활했다고 한다.


카진스키는  세상의 어려운 문제는 이미 다 해결되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우울하다고 주장했다. 이제 남은 것은 쉽거나 불가능한 것들뿐이고, 그런 일들은 추구해봐야 불만족만 깊이 쌓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도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이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아인슈타인도 못 해냈을 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진스키의 생각은 기존의 기관들을 파괴하고 모든 기술을 없애버려 사람들이 새로 시작할 수 있게, 어려운 문제에 새롭게 도전할 수 있게 해 주자는  것이었다.


테러와 연쇄 자살. 드러난 결과는 달랐지만 세연이 가진 세계관과 무섭게 닮아있다.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일 수 있는 '나'도 세연의 극단적 계획에는 저항했지만 이 시대를 살며 느끼는 절망감은 세연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내 처지를 가만히 생각할 때면 식당에서 키우는 개가 생각났다. 손님들마다 한 번씩 쓰다듬고 목을 만지고 지나가는데, 정작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피곤한 개 말이다. 사람 손을 탈 대로 타서 이제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손님이 귀찮기만 하지만 손님에게 짖거나 손님을 물었다간 주인에게 맞는다. 손님이 자기 꼬리를 만지든 불알을 만지든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다. 그런 예속된 삶. 식민지 백성의 삶.


식당에서 키우는 개의 비유는 책을 통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노예로, 내 감정을 감춘 채 타인의 욕망과 권력에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은 '꼬리를 만지든 불알을 만지든' 저항할 수 없는 식당의 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그런 개들 중에는 지나가는 손님의 손길을 통해 따뜻한 잠자리와 식사를 보장받겠노라, 발랄하게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흔들어대는 순응력 강한 녀석도 있겠지만 말이다.


주인공 '나'는 사회의 부조리함에 순응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 없다고 하는 세연의 사상에도 동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연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다짐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우리 사회에 모순이 쌓이지 않는다는 세연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있다.(중략)

아마 나는 그때 웹사이트를 하나 만들 수 있으리라. 그 웹사이트에 와이두유리브닷컴(whydoyoulive.com)에 대한 대답으로 디스이즈더리즌닷컴(thisisthereason.com)과 같은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을 비관한 회의주의자들 덕분에 주인공 '나'는 오히려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의지를 얻게 된 것이다. 신들이 내린 형벌에 저항하며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의 의지처럼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문명의 충돌 / 새뮤얼 헌팅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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