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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01. 2020

코로나 시대의 바다 여행


맨날 발라드와 클래식만 듣다가 내 정신이 너무 우울해지는 것 같아 최신곡 리스트를 골라서 한 번 들어보았다. BTS의 신곡이 압도적 1위였고 유재석이 이효리, 비와 만든 댄스그룹 '싹스리'의 신곡이 뒤를 잇고 있었다. 


세계적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BTS노래를 몇 번 반복해서 듣고 나서 다음 곡으로 넘기니 싹스리의 노래가 나왔다. 제목이 '다시 여기 바닷가'란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휴가철에 가볍고 신나는 여름 노래 들으면서 놀러 다니던 것도 생각이 나서, 코로나로 어디 다니지도 못하는데 가족들하고 음악 들으며 드라이브나 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다. (물론 우리 아들은 절대 따라나서지 않을 거다.)


요즘 재미를 붙인 수면 명상(사실은 수면 유도)을 들으려고 찾아보니 '바다 명상'이란 게 있었다. 낮에 신나는 '싹스리'의 바다 노래도 들은 김에 플레이를 누르고 자리에 누웠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고 음악과 함께 내레이션이 나왔다. 눈을 감고 있자니 상상 속의 바다가 보인다. 


그런데 내 눈 앞에 보이는 바다의 모습은 내레이션에서 유도하는 모습과는 차이가 많았다. 바다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그리 즐겁고 아름답지 않았다.


이상했다. 


왁자지껄한 여름 해변가,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뚫어 줄 파란 하늘과 파도 소리,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따뜻한 모래. 바다는 이런 행복과 연결된 이미지가 아니었던가.


어젯밤에 누워서 본 바다는 외롭고 쓸쓸했다. 도시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도망치고 버려진 느낌이었다. 수평선까지 뻗은 바다가 시원해 보이지 않았다. 저 수평선을 넘어서도 무한히 반복되는 똑같은 바다의 풍경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하게만 보였다.


요즘의 나에게 바다는... 그런 곳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학교 근처에서 술을 마시다가 바다를 보고 와야겠다며 혼자 속초에 간 적이 있었다. 떨쳐버리고 싶은 생각들을 다 비우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새벽에 도착한 바다는 기대와 다르게 죽을 만큼 시커멓고 무서웠다. 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검은 바다를 향해 잠시 서 있는데 비수기에 투숙객 한 명이라도 더 받으려는 호객꾼들이 여럿 다가와서 숙소를 찾는지 묻는다. 바람이 차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과 자꾸 말을 섞는 것이 불편해 늦게까지 영업하는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지금이야 혼자 술 먹기의 달인이 되었지만 그 당시는 혼자 술집을 찾은 적이 거의 없었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아 간단한 안주에 소주를 시켜놓고 먹었는데, 혼자 앉아 있자니 어색하기도 하고 생각도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소주 한 병 마시고 시계를 보면 겨우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세병을 마시다 안 되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다. 호객꾼들 때문에 기분도 상한 탓에 숙소를 찾는 대신 지칠 때까지 걷다가 터미널 대합실에서 아침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침에 바닷가에 다시 나가 보았지만 날씨가 흐려 아침 해는 보지 못하고 그냥 서울행 버스에 다시 올랐다. 밤새 지쳐있었고 머릿속도 엉망인 채 그대로였다. 혼자 찾아간 바다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낭만적이지도 않았고 친절하게 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도 않았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구나.'


그랬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떠나 온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일은 여행이 주는 큰 기쁨 중 하나인 것이다.


정리된 것은 하나도 없었고, 고작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는데,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 길은 왠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밤바다보다 훨씬 포근했다.



7년 전 어느 일요일, 샌디에고 해변가에서 혼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젊은 애들이 서핑을 하러 하나둘씩 모였다. 


녀석들은 보드 위에 배를 깔고 누워서 팔은 축 늘어뜨려 물에 담근 채 파도에 무심히 흐느적거렸다. 그러다가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면 잽싸게 일어나 파도를 탔다. 그렇게 파도가 한 번 지나가면 언제 그랬나 싶게 다시 보드에 누워 이리저리 여유롭게 떠다녔다. 


'파도가 없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구나.'


그날 그 녀석들의 모습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서핑을 한다는 것은, 파도를 타는 것뿐만 아니라 파도를 가만히 기다리는 일도 필요한 것이다. 파도가 오기 전에는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열심히 팔을 저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질없는 짓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파도가 오지도 않는데 뭐라도 해보겠다며 팔을 휘졌고 있었고, 파도가 안 오면 어쩌냐며 조바심 내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바다에는 갈 일이 없었는데, 유튜브에서 소개해준 수면 명상 덕분에 상상 속에서나마 바다에 다녀와서 좋았다. 외롭고 쓸쓸한 바다였지만 그건 단지 요즘의 내 마음이 '잠시' 그런 탓이리라. 





p.s. 

여름에 올렸던 글이라 철 지난 느낌인데 해가 지나서 올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다시 포스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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