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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17. 2020

길을 묻다: 길치도, 노력하면 될까요?

몇 달 전 장만한 중고차에 설치되어 있는 내비게이션에서, 지도가 업데이트되었으니 다운받으라는 메시지가 떴다. 잘 이해했고 나중에 설치하겠다며 확인 버튼을 눌러 주어도 운전할 때마다 매번 메시지가 뜬다. 지도 업데이트야 중요하니 잊지 않도록 철저하게 상기시켜주는 것은 고맙긴 한데... 살짝 귀찮다.


하긴 생각해보면  내비게이션 없이 다니던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나는 장애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지독한 길치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낯선 곳이라도 가야 하는 날이면 출발 한참 전부터 난리 법석을 부려야만 했다.  


우선 '전국 도로지도'에 포스트잇과 페이지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여가며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확인한다. 스티커는 펼쳐야 하는 페이지 순서에 맞게 책 상단에서부터 차례로 붙여야 찾기 쉬었다. 페이지를 찾더라도 그 전 페이지로부터 어느 방향에서 길이 이어지는지 바로 찾기 어렵기 때문에 길이 연결된 곳을 찾아 다시 스티커로 표시를 한다.  그리고 신호 대기하는 동안 얼른 봐야 하기 때문에 순서대로 펼치는 연습을 미리 해본다.


전국도로지도 (출처: 인터파크)

놀랍게 요즘에도 나오는 것 같다.


물론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한 번에 찾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길을 잘못 들거나 표지판을 찾지 못해 차를 세우고 물어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힘겹게 길을 찾아 무사히 도착을 한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는 일 역시 엄청나게 고역스러울 때가 많았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 돌아오는 길은 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오기만 하면 될 것 같지만, 막상 뒤돌아 섰을 때 보이는 길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길로 보이곤 했다.


장소를 얘기할 때 사람들은,


"아 그 식당! ㅇㅇ 사거리, xx 빌딩 뒤편에 있는 거 말이지?"라든지,

"ㅇㅇ고속도로 타고 가다가 xx에서 빠져서 ㅇㅇ방향으로 뚫린 새 고속도로 타면 금세 가."


이런 표현을 이해하려면 머릿속에 뭔가 입체적인 그림이 그려져야 할 것 같은데, 나에게는 가능치 않은 일이다. 이건 자기 계발의 영역을 넘어 본능, 직관, 공간지각력, 기억력과 같은 타고남의 문제이니까.


그 당시 나에게 있어 잠시 멈추어 길을 묻는 일은, 내가 가는 여정의 훌륭한 아날로그식 내비게이션이었다. 가고 있던 길이 맞으면 그 즉시 확신과 안도감을 주었고, 만약 틀린 곳으로 가고 있었다면 얼른 궤도를 수정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버리는 일도 방지할 수 있었다. 길을 물어본 사람은 다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니 내 자존심에 흠집을 낼 가능성도 거의 없어 마음 편히 물어보곤 했다.




그나마 내비게이션이 나온 이후, 길치의 고통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나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인생에서 길치다. 40년을 넘게 살아 보았으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남은 인생의 길은 여전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이다. 인생의 길엔 정답이란 없으며, 그 길을 걸어서 가든 뛰어서 가든 그 방법에 옳고 그름도 없다고들 하는데...


난 아직도 머뭇거린다.


뒤돌아보면 어딘가로 한참을 걸어온 것은 알겠으나, 여기가 어디쯤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출발점에서 앞으로 나아간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뒤로 간 것은 아닌지... 어쩌면 처음부터 출발점이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여정에서 굳이 애써 출발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딘가에 도착하 않아도 된다고, 누군가 얘기해 주면 좋겠다.


We can never know what to want, because, living only one life, we can neither compare it with our previous lives nor perfect it in our lives to come.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절대 알 수 없다. 고작 한 번 사는 인생이기에, 전생의 삶과 비교할 수도 없고 다음 생애에 그 삶을 완벽하게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어쨌든 세련되게 지도 업데이트해가며 편안하게 인생의 길을 찾아갈 일은 앞으로도 없어 보이니, 그냥 내 방식대로 내 삶의 페이지에 스티커 붙여가며, 주변 사람들이 귀찮다고 해도 물어 물어 가야겠다. 비록 모르는 길을 가는 것이 두려울지언정 물어보는 것을 쪽팔려하지는 않는 길치이니 말이다.


p.s. 길치 분들 오셔서 함께 헤매는 것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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