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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24. 2020

친구는 결국, 소용없나요?

feat. 에피쿠로스/알랭 드 보통

지루한 일요일 오후 아무 데나 누워 있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꿈속에서 전화가 한 참 울리다가 받은 것 같았는데 친구는 왜 이리 전화를 빨리 받냐고 한다. 꿈속에서의 시간은 현실보다 훨씬 길어서였을 테다.


"요즘 쓰냐?"

"뭘?"

"블로그 말이야"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대며 잠을 쫓았다. 얼마 전, 노량진 수산시장 철거 상인들을 돕기 위한 공연에 갔다가 친구에게 블로그를 다시 열었다는 얘길 했던 게 기억났다.


"어, 쓰고 있지. 생각보다 잘 안 되네. 감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글쓰기를 게을리한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자신감도 많이 떨어져서 그야말로 '감'이란 게 필요하다. 그래서 일단은 질보다 양. 글의 양이 좀 쌓이고 가속도가 붙을 때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쓰기로 했었다.


그런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반 백 년을 함께 살아온 나의 회의주의적 자아는 자꾸만 내가 감이 떨어져서 방문자수가 적은 것이라면서 글이 진부하다, 재미가 없다 투덜거렸고 사람들이 원하는 내용, 이를 테면 재테크, 부자 되기, 여행, 취미 노하우 등등을 써야 하지 않겠냐고 칭얼대기도 했다.


"일단 그냥 쓰고 있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그래. 다섯 개 정도 읽어 봤는데… 나도 이제 고인물이라 그런지 눈에 '자동 첨삭 기능'이 생겨버린 것 같아. 글에서 90년대 신문 칼럼의 느낌도 들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성이랄까, 뭐 그런 게 보이긴 하네."


작가 짬밥 20년을 넘게 먹은 친구 녀석의 위로 섞인 비평이었다. 90년대 신문 칼럼이 어떤 느낌일까 잠시 생각해 봤는데, 옛날 트렌드, 한자, 신문지, 꼰대… 이런 기억뿐이다. 구닥다리란 얘기다. 감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내 회의적 자아가 옳은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으로서 그 당시 감성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리 기분 나쁠 것도 없다. 구닥다리일지언정 적어도 나름의 색깔은 있다는 의미니까.




♤ 내가 글을 쓰는 이유 - 에피쿠로스의 행복론


글을 쓰는 것은 도무지 다스려지지 않는 내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 걸 자유라고까지 거창하게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느낀다.  요즘 시대에 자유라고 하면 경제적 자유가 최고인데, 나는 아직 90년대 감성이다. 내 글이 막 인쇄되어 나온 석유냄새 풍기는 신문지 사이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페이지로 넘겨지는 인기 없는 칼럼이어도 괜찮다.


다만, 내 친구들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나에게, 친구들이 글을 읽어 주는 것은 수 만 명의 구독자를 모으는 것보다 중요한 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 천년 전 에피쿠로스가 말한 행복으로 다가갈 수 있는, (나의 뇌피셜로 생각해 낸) 가장 멋진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행복을 위한 세 가지 덕목은 이렇다. 우정, 자유, 그리고 사색.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켜봐 줄 누군가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다른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것이다.
(철학의 위안 / 알렝드 보통)


에피쿠로스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자들과 뒤통수를 칠지도 모를 변덕스러운 자들(요즘 말로 하면, 이기적인 또라이들)을 위해 일하지 않기 위해, 비록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이었지만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다. 이들은 검소하게 사는 방식을 통해 경제적인 자유를 누리고, 도시의 사람들이 중요히 여기는 가치들로부터 벗어나 서로를 판단하거나 저울질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자유의 모습이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사색은 인간의 불안과 마음의 고통을 다스리는 최상의 방법이다. 에피쿠로스 공동체에 모인 친구들은 상당수가 작가였으며 그들은 모여서 돈, 질병, 죽음 그리고 초자연에 대한 것들을 사색하고 토론했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나이 먹으면 친구고 뭐고 다 소용없어!


진정한 친구라면 내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를 찍을지언정 가난하고 무능한 사람이라 손가락질하진 않을 테다. (저런, 어쩌다가...라고 혀를 찰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내 서툰 글을 보면서도 나를 지지해 줄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것이 불안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사랑과 존경은 내 삶을 지탱해주고 기쁨을 주는 큰 재산이 될 것이다.


물론 중년의 남자들에게 친구와 우정을 얘기하면, 열에 아홉은


"야, 나이 먹으면 친구고 뭐고 다 소용없어!"


라고 한다. 같은 사무실의 한 동료는 고등학생인 자기 딸내미가 친구를 만날 시간이 없어서 괴롭다는 얘기를 하자, 친구 따위가 뭔 대수라고 그 딴 소리를 하냐. 그냥 공부나 라고 화를 내고 싶었으나 집에서 쫓겨날 것 같아 아무 말도 못 한 채, 방에 들어가 유튜브를 보며 화를 삭였다고 했다. 또 다른 동료는 인생은 각자도생이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어렵듯, 나이를 먹을수록 우정을 유지하고 친구를 얻는 일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오랜 시간 굳어진 마음, 사람과 관계에 대한 실망, 하루하루 생활에 찌든 피곤함. 이런 인생의 고단함을 극복하고 친구를 사귀는 일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중년들은 눈 앞의 물질적 목표 때문에 친구 사귀는 일을 '포기'한 것뿐이지, 진심으로 친구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외롭다. (그리고 나도...)



♤ 그들에게 먼저 건네는 악수와 같은 것


다만 중년의 나이에 십 대의 우정으로 친구를 만날 수는 없다. 에피쿠로스처럼 공동체를 만들어 모여 살 수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삶을 지키면서, 조금씩 공감하며 가까워져야 한다. 


그 공감의 과정에 글쓰기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구독자나 라이킷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보다, 내 친구들이 (또는 앞으로 친구가 될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글을 통해 내가 먼저 나를 드러내고 보여주 것. 그것은 내가 그들에게 먼저 건넨 악수와 같은 것이다.


결국 우리가 친구 사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친구들과 글을 나누고 공감하며 우정을 쌓을 수 있다면 에피쿠로스가 말했던 우정과 자유, 그리고 사색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상, 내 미래의 친구분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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