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의 이너콘서트 Dec 06. 2020

추억이 완벽해질 조건

feat. Sixty Nine / 무라카미 류

[1]

비가 한창 내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굵은 빗발이 창문을 시원하게 때리며 내리고 있었다. 고3이 방학이라고 놀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한 선생님들은 여름방학 보충수업이란 걸 한다며 굳이 우리를 불러 모았다. 쉬는 시간, 맨 뒷자리에서 노닥거리던 우리는 머리 위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것이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마 비가 쏟아지는 어두컴컴한 날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야, 심심한데 저 형광등이나 갈자.라고 하며 책상을 밟고 올라가 형광등 2개를 빼내었다. 내가 올라간 사이 놈들이 배신하고 책상을 밀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무사히 형광등을 빼내고 아래로 내려왔다. 


"책상 그 자리에 놔둬. 새 거 금방 가져올게!"


비품실은 본관 건물 현관에서 10미터쯤 떨어져 있는 별관에 있었는데 난 플라스틱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고 우산도 없었지만 몇 걸음만 뛰어서 건너가면 되니 문제 될 건 없었다. 나는 물 고인 곳을 피하며 겅중겅중 3단 점프를 하면서 비품실 앞으로 뛰었다. 역시, 책상 위에서 무사히 내려온 것은 오히려 내 불운의 전조였었던 것인지, 난 비품실 문 앞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말았다. 공중에 붕 떴다가 떨어지는 동안 시간이 잠시 멈춘 느낌마저 들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녀석들의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아팠지만 쪽팔려서 그냥 잠시 누워 있었다. 빗물이 가득히 고인 바닥에  누워 있으니 옷은 금세 다 젖고 말았다. 친구들이 달려와서 몸을 일으켜 주는데, 내려다보니 오른팔과 셔츠가 온통 피범벅이었다. 형광등에 손바닥과 팔이 여러 군데 찢어진 것이다. 


바닥에 떨어질 때 부딪힌 충격이 좀 가시자 그새 쪽팔렸던 기억도 잊어버리고, 여름 소나기 소리와 함께 피를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이 나름 홍콩 느와르에 나오는 비운의 주인공처럼 비극적이고 멋있게 느껴졌다. 아, 이 고딩의 유치함이란...  게다가  반 애들이 모여들어 괜찮냐고 물어보는 통에 갑자기 인기인이 된 것 같아 우쭐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아픈 척을 하며(나중에 상처를 꿰매러 병원에서 보니 굳이 엄살을 부리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많이 찢어지긴 했었다)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일단 교실로 갔다. 방학 중이라 양호실은 문을 열지 않았다. 한 놈은 상황을 설명하러 선생님께 달려갔는데, 선생님도 놀라셨는지 금세 달려오셨다. 비 때문에 옷도 젖고 피도 번져 여기저기 범벅이 되었던지라, 선생님의 눈 앞에는 깨진 형광등에 살이 베인 정도가 아니라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간 정도의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선생님은 옆에 서있던 녀석에게,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받는 것을 도와주라고 하셨고 그 순간 난 그 녀석의 입가에 '아싸!' 하는 미소를 읽을 수 있었다. 녀석은 광속으로 자신의 가방과 내 가방을 싸더니 빨리 병원으로 가자며 앞장을 섰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배가 아팠다. 그 피범벅의 장엄한 순간에, 반 아이들이 교실 뒷문으로 따라 나오며 나를 걱정해주는 상황에서(사실은 수업을 땡땡이치는 부러움 때문이었겠지만) 멋지게 복도 저편,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주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야, 안 되겠다. 나 화장실 좀. 너 교실에서 잠깐 기다려."


일찍이 내 인생에 그렇게 초라하고 폼 안 나는(?) 배변의 씬(Scene)은 없었다. 쉬는 시간을 틈타 흡연한 녀석들 탓에 화장실은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좌변기도 아닌 수세식 쭈그려 싸 변기에서 오른팔을 쳐들고 피를 줄줄 흘리며 일을 봐야 했다. 젖은 교복 때문에 자세마저도 잡기 힘들었다.  마무리도 왼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니... 일처리의 완벽함을 기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5분, 10분 일을 보고 나와 교실로 돌아오니 이미 녀석들의 관심은 사라져 버렸다. 선생님은, '똥 쌀 정신이 있는 거 보니 괜찮은가 보네. 반창고나 사서 붙여라'며 놀리셨다. 가방을 싸 놓고 기다리던 녀석만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듯 일어서서 교실을 나섰다.


배만 아프지 않았다면, 반을 대표해서 모범적으로 형광등을 갈려고 했던 한 착한 학생이 안타깝게도 사고를 당했으나 무사히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아름다운 스토리로 기억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멋진 이야깃거리가 될 뻔한 이 사건은... 그렇게 똥의 무게에 묻혀, 덤벙대는 꼴통 녀석이 피 흘리며 똥 싼 얘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비록 결말은 코미디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난 이 결말이 더 좋다. 


[2]

무라카미 류의 자전적 소설인 Sixty Nine(식스티 나인)에서 주인공인 야자키 겐스케('겐'이라고 불린다)는 대학 진학을 앞둔 고3 시절, 공부에는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졸업을 하기 전에 페스티벌이나 열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미 록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있었고, 신문부 활동도 하는 그였기 때문에 스스로 페스티벌을 채울 콘텐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페스티벌을 위해 영화도 하나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겐은 배우를 찾는 중에 레이디 제인이라고 불리는 얼짱 마츠이 카즈코에게 반하게 되었다.  


마츠이를 섭외하기 위해 교내 신문 인터뷰를 핑계로 영어 연극부에 찾아갔지만 지도 선생님은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았다. 겐은 이 선생님과 베트남 전쟁에 관한 설전을 벌이는데, 이 모습을 본 마츠이가 호감을 표하며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겐은 마츠이가 데모, 바리케이드 봉쇄와 같은 말을 언급했던 것을 생각하며, 실제로 바리케이드 봉쇄를 실행하기 위한 계획을 짠다. 아주 즉흥적으로. 겐의 계획이라 함은, 밤에 학교에 몰래 들어가서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건물 옥상에 걸고, 방송국과 신문사에 자신들의 범행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날을 정해 늦은 밤 학교에 침입한 겐과 친구들은 붉은 페인트로 여기저기 낙서를 했다. '네놈들은 시체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라'와 같은 글을 바닥에 그렸다. 그리고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는 플래카드를 건물 옥상에 걸었다. 그러던 중, 함께 있던 나카무라가 갑자기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뭐가 아닌데? 말해봐, 겐이나 나나 무섭긴 마찬가지야, 부끄러워하지 말고 왜 그러는지 말해봐...."
"똥이 마려워요."


극도의 긴장된 상황에서 이 말을 듣자 모두들 배가 아픈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살면서 가장 슬픈 장면을 생각해 보는데, 어머니가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주지 않은 일이며, 아버지가 바람피워 어머니가 가출한 일, 축구를 졌던 일 같은 것을 생각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겐은 예쁜 마츠이의 모습을 (아주 디테일하게) 생각했다. 


'예쁜 소녀는 웃음을 멈추게 하는 약이 되기도 한다. 남자를 진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퇴학을 당할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그 순간에 고작 똥 때문에 터진 웃음을 참느라, 이 밤의 거사와 긴장감은 모두 잊고 만 것이다.


겐은 또다시 즉흥적으로, 나카무라를 교장실로 데리고 가서 교장실 책상 위에 올라가 일을 보도록 했다.


"소리가 크게 날 것 같으면 그만둬, 알았지?"
"그만두라고요? 한번 나오면 그만둘 수 없어요."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교에 등교한 아이들은, 교장실을 들여다 보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야, 똥을 맨 먼저 치울 것은 뻔한 일이니까. (중략)
아마도 수위가 치웠을 거야. 수위는 6시에 일어나니까, 낙서를 보고는 깜짝 놀라 제일 먼저 교장실과 교직원실을 둘러보았겠지. 그때 똥을 발견하고 치웠을 거야. 똥이란 말이야, 뭐라고 할까, 농담이 되기 어려운 거니까."


겐의 친구들의 입장에서 교장실에 남은 나카무라의 힘쓴(?) 흔적은, 그날 밤의 거사를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그 현장에서 잡혔다면 플래카드에 허세 가득하게 적힌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라는 말은  그저 교장선생님 책상에서 똥이나 싸지른 철없는 것들의 만행 정도로 묻혀버릴 수도 있었다. 


퇴학을 감수하고 저지른 일이 그렇게 폄하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행히 수위 아저씨 덕분에 이들의 침입 작전은 기대했던 대로, 똥이 끼어들 틈 없는 진지한 사건이 되었고 경찰까지 나서는 일이 되어버린다.


[3]

사회에 나와 하루도 찬란할 것 없는 찌든 삶을 살다 보면, 내 기억 속 먼 추억들 하나하나가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 추억이 점점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과 지금의 보잘것없는 현실이 대비되는 탓도 있겠지만, 때로는 내가 자기 연민에 빠져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 무의식적으로 추억의 서사를 아름답고 완벽하게 포장하려고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지금보다 특별할 것 없는 시간들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편집해서 소환하는 아름다운 추억들 사이사이에, 일상의 지루함, 어린 날의 찌질하고 나약한 모습, 무한히 반복되는 실수들도 함께 담아 다시 기억을 소환해 본다. 과거의 보잘것없는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p.s. 

아름답고 향기로운 추억을 위해, 과식과 과음을 피하고 늘 장을 건강하게 유지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구는 결국, 소용없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