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01. 2020

소주를 싫다고 말하면 안 되는 이유

feat. 라면을 끓이며

난 소주가 싫다. 


첨가물의 인공적인 맛도 싫고 삼킬 때 코로 올라오는 역한 냄새도 싫다. 죽기 살기로 달리는 회식 분위기에 과음이라도 하게 되면 그 역한 냄새는 내 머리 전체를 가득 채운다. 그나마 먹을만한 건 소맥이다. 밍밍한 맥주에 알코올을 더 해주면서 역한 소주 맛을 잡아주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괜찮은 대안이다.


어느 목요일 오후,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데 관리담당이 단톡 방에 메시지를 보낸다.


"법인장님도 출장 가셨고 마감도 잘했으니 오랜만에 소주나 한 잔 합시다."


"좋습니다"

"오예~"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다들 심심하고 답답했었는지 반응이 뜨겁다. 보통, 회사 사람들과의 회식에서 메뉴나 술 종류에 대해서는 내 의견을 내지 않는다. 어차피 잘 안 맞을 거라 생각해서이다. 회식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이지 음식을 먹는 자리가 아니라는 나름의 타협인 셈이다.


그런데 그날은 웬일인지 편하게, 그리고 맛있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제안을 했다.


"근처에 맛있는 스테이크 집을 하나 찾았는데, 거기서 와인 곁들여서 식사하시죠. 소주는 늘 마시니…"


한 동안 대답이 없다가 W 담당이 말문을 열었다. 


"아니 술 한잔 먹으면서 얘기하자는 건데 웬 와인이야? 사람이 눈치가 없구먼!" 

"아 네... 그렇죠. 술 말씀하신 거죠..."


아저씨들의 인식 속에 술은 곧 소주고 소주는 술이다. 맥주는 입가심으로 마시는 음료수이고, 와인은 젊은 애들이나 연애할 때 마시는 허세다. 위스키는… 맥주에 섞어 폭탄이나 돌리며 질펀하게 노는 자리에서 먹는 술 정도?


내가 소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커밍아웃 하자 한동안 아저씨들은 같은 주제로 나를 괴롭혔다.


"너 소주 안 좋아한다며? 이거 마실 거야?"


나는 소주를 폄하한 죄로 매 번 "소주는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있으면 잘 마십니다" 따위의 내 주(酒)체사상을 검열받아야 했다. 


"선배님, 보세요. 소주는 원래 태생이 맛이 없잖아요. 이게 타피오카나 고구마로 만든 주정(에탄올)을 희석해서 만드는 술이에요. 그 에탄올의 역한 맛을 잡자고 올리고당, 아스파탐 이런 거 넣었다고요. 그러니 그게 맛이 있겠어요?"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난 말하지 못한다. 왜냐면, 이 대화에서 소주에 대한 팩트 체크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한국 사람에게 소주는 단순히 마시는 술이 아니라 뼛속까지 인이 박인 정서이고 친밀함이고 자부심이다. 소주의 역함을 탓하지 않는 것은 그 맛이 이미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소주를 취향의 문제로 가볍게 취급하거나 감히 싫다고 말하는 건 소주 마시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할지도 모를 일이다.


김 훈 작가는 오랜 시간 라면을 먹으며 그 맛이 인이 박이고 뼛속에 사무친다고 했다.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중략)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중략)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인다.(중략)
이래저래 인은 골수염처럼 뼛속에 사무친다. 
삶의 심층구조와 서사적 로망을 회복한다는 것은 이제는 영영 불가능해 보인다.
이 부박한 삶의 영양소로서 라면은 몸속으로 들어온다. 

 김 훈 <라면을 끓이며 中>


'삶의 심층구조와 서사적 로망'을 회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미 인이 박인 맛은 거부할 수 없다. 그래서 김 훈은 라면을 먹는다. 소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깊은 이해와 공감의 과정을 거쳐 본 들, 내 뼛속에 소주 맛을 인이 박이도록 할 수는 없다. 

난 소주가 싫다. 다만 술의 취향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들키지 말기로 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