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지

by 에포케

오락가락하는 계절 앞에서도 별다른 감흥 없이 무채색으로 보이던 나날들.

계절만큼 나의 감정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믿던 지난 시간들은 무성영화처럼 그저 옛이야기가 된 듯 옷을 바꿔 입는 계절을 보면서도 무미건조한 눈빛.

대체 왜 그럴까. 나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던 상황.

사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마주 보고 싶지 않던 내 감정들. 군것질을 잔뜩 하고 쌓여있는 흔적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순간의 즐거움만 기억하고 남겨두려는 습성.




걷는 길이 푸석했던 건 갱지 위를 걷고 있어서였나

시험대 위에 놓여있다는 께름칙한 긴장감이 생기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갱지에 찍힌 잉크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말라붙어 황량하기만 한 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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