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예수다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민 Mar 01. 2018

하늘에서 가장 큰 자

거의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눈을 피해 그들만의 서열 싸움을 했다.

원래 인간들은 서로 모이면 본능적으로 서로에 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서열과 우열을 정한다.
기본적으로는 나이, 학벌, 재산, 스펙 등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누구와 얼마큼 친한가에 따라서도 서열이 정해지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서열을 정하는 일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포유류에서 일어나는 동물적 본능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본능적으로 서로 으르렁 거리면서 서열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함께 하시기 직전까지..
제자들이 서열 때문에 항상 다투는 이유는 아마도 자기들끼리 서열을 정하기에 특별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그 제자들 사이에는 바울 사도 같은 존재감이 있는 제자가 없었다.

어부, 세리, 의사, 혁신 당원까지, 그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류의 서열에 끼지 못하는 하층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제자들은 서열에 대해서 확실히 정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가서 아주 점잖게, 신학적 관점으로, 자신들의 서열 논쟁을 감추어 우회적으로 이렇게 질문을 한다.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마태복음 18장 1절)


과연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자를 궁금했을까? 
아마도 “예수님, 예수님 다음에는 우리 중에 누구인가요?”라고 물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제자들은 하늘에서 큰 자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큰 자와 땅에서 큰 자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 같다. 예수님도 목수 출신이어서 어쩌면 이들은 하늘의 큰 자에 관한 특별한 인사 시스템(?)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2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마 18:1-4, 새번역)


그 당시 어린아이들의 지위는 여자처럼 재산의 일부분이었다. 아이들은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다.
우리나라 어린이보다는 빈민 국가의 어린이들, 쓰레기통을 뒤지는 어린이들을 생각하시면 그들의 대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런 어린아이를 세워서 하나님 나라에 있는 가장 큰 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과연 그런 하나님 나라를 가고 싶었을까?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라는 완전히 다른 나라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늘나라의 사람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다. 가장 높은 신 분으로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섬기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더라도 우리는 하늘나라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자신을 세우려고만 할까? 서열에서 항상 존중과 존경받기를 원할까?
에덴동산으로 넘어가 보자.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창 3:5, 새번역)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늘에서 가장 큰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하며(하나님과 동급)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아담과 하와가 왜 그렇게 황당한 제안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을까? 뱀이 그토록 달콤하게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고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알고 있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어떻게 저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었을까?


이 황당한 이유를 나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 까뮈를 키우면 알았다. 까뮈는 3살 푸들이다. 놀랍게도 이 까뮈는 우리 집에 와서 자신이 우리 가족의 서열을 정했다. 나는 서열 1위다. 까뮈가 보기에 나는 이 집에서 가장 무서운 개다. 아내가 2위다. 아내는 자신의 엄마 개다. 까뮈의 실질적인 주인인 우리 딸은 자신의 바로 밑에 있는 강아지로 여긴다. 가장 하층 계급은 아들이다. 까뮈는 아들이 자신의 옆을 지나가면 이빨을 올려서 으릉렁 거린다. 까뮈는 아들을 옆집 고양이로 취급한다. 까뮈는 나의 아들을 아마도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아내의 극진한 까뮈 사랑으로 인해서 강아지가 오만방자해진 것 같다.


아담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은 아담.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물은 자신의 형상으로 아담의 형상을 만들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에덴동산을 지키는 일을 했다. 그런 아담은 너무나 큰 사랑을 받았기에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과 동급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한 것 같다. 그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나무에 선악과를 따서 먹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처럼 되어서 자신의 사랑을 십자가 위에 달리셨다. 
그런 예수님이 모습이 인간에게 오셨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겸손하시다고 말하지만, 천국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들이 사는 곳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인간들 앞에서 낮추어 섬겨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원래 어린아이처럼 겸손 한자로 만드셨다.
우리는 원래 하늘나라에서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을 높이는 피조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 낮추실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낮추려고 하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낮아지게 하신다. 
겸손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원래 천국은 이런 겸손한 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이다. 
혹시 우리가 낮아짐을 당해서 마음이 불편했다면, 그것은 사람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낮아짐을 느끼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멍에를 우리에게 짊어지게 하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마 11:29, 새번역)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사 57:15, 새번역)


우리가 겸손하려고 마음을 내려놓을 때, 주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나님의 비전, 나의 야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