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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수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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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Aug 15. 2019

자기다움에서 예수다움으로(1)

웃긴 질문과 위험한 대답

예능(오락 프로그램)의 퀴즈에서 출연자들은 평범한 질문에 황당하고 무지한 대답을 진지하게 말한다. 생각 없는 아무 말 잔치가 어이없지만 웃기다.

상식 수준의 질문인데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그들의 엉뚱한 대답(작가가 써준 대본일까?)이 때로는 듣기에 민망하고 안쓰럽지만, 예능인이 주는 엉뚱한 즐거움이 있다.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 시청 가능 연령은 (간혹 15세 이하도 있지만)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미취학 아동부터 노인까지 볼 수 있는 전 연령대와 12세가 대부분이다. 그 때문에 예능 프로그램은 딱 그 정도의 수준에서 주는 웃음을 준다.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나의 수준도 그들과 별반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바보상자 안에서 바보들이 만든 바보들의 퀴즈를 보면서 같이 바보가 된 것 같다. 만약에 예능 프로그램 퀴즈에 나온 연예인이 제퍼디 jeopardy 수준의 지적 수준으로 정답과 맞춘다고 가정한다면 내가 지금처럼 재미있을 수 있을까?

12세 관람가 예능 프로그램 퀴즈에서 제퍼디 수준의 문제가 나온다면 과연 적절할까?

반면에 제퍼디 프로그램에서 예능 수준의 문제가 나온다면 어떤 상황이 연출이 될까? 둘 중에 어떤 프로그램이 12세 관람가 예능 프로그램에 가까울까?



에덴 퀴즈, 자기다움을 흔들어 버리는 무지한 그리고 무서운 질문 

에덴동산에 사는 인간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사탄은 무엇을 준비했을까? 사탄은 공포 영화에서 나오는 괴물처럼 발톱과 뿔을 보여주고 무력시위를 하면서 위협하지 않았다. 만약 힘으로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겁주려고 했다면 뱀보다는 악어나 호랑이를 택했을 것이다. 뱀의 크기와 모습만 보더라도 호랑이와 악어에 비하면 위협적이지 않고 보잘것없었을 것이다. (독사라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이런 뱀이 하와에게 선제공격으로 질문을 하는데, 그 수준은 거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는 황당한 질문이었다. 



창세기 3장 1절 

"정말 하나님께서 '동산의 어떤 나무의 열매도 먹으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느냐?"


아담과 하와의 일용할 양식이 나무 열매였다는 것을 뱀이 몰랐을까? 뱀의 이름을 지었던 아담은 이 황당한 질문을 하는 뱀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이유를 묻지 않았을까? 뱀의 질문은 상식 이하이며 난센스 퀴즈였다. 하지만 뱀의 특성을 생각해보자.

뱀은 먹이를 기다렸다가 덮쳐서 먹이를 휘감아 죽이거나 독으로 죽인다. 뱀은 사냥감이 안심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을 때 공격을 한다. 그러니깐 뱀은 자기의 본성대로 사람을 사냥한 것이다.

독 뱀에 물려 보지는 않았지만, 물린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주사를 맞거나 바늘에 찔린 것처럼 처음에는 따끔거린다고 한다. 그렇게 뱀의 이빨에서 나온 독은 혈관을 따라서 온몸으로 퍼져간다.

뱀의 어수룩한 질문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뱀은 이미 하와가 무슨 대답을 할지 그리고 선악과에 대해서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할지를 알고 있거나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떤 말에 하와와 아담이 넘어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와에게 질문했던 뱀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예능적 수준의 질문을 한다. 


아내가 있지만 정말로 평생 한 명의 여자만 사랑해야 할까? 아브라함도 아내가 많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장로님과 집사님도 사업상 필요하다면 뇌물을 바치는데 내가 너무 꽉 막힌 것은 아닐까?

이 시대 생존 법칙으로 자기 자랑과 타인 비판은 어쩔 수 없는데 굳이 입을 꼭 막아야 할까?

상식적으로 정직과 진정성만으로 비즈니스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데 나는 꼭 그 길을 선택해야만 할까?

평생 주일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려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성경에 분명히 있다.

거짓말하지 않고, 뇌물을 주거나 받지 말고,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하지만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고 있거나 이런 질문에 대해서 말씀으로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말하지 않고 있다면, 이미 독은 몸에 퍼지고 있다.



하와는 뱀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창세기 3장 2절 - 3절 

여자가 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들의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말고 건드리지도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여자는 사단의 예능급 질문에 제퍼디급 대답을 한 것일까? 뱀은 하와의 대답에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황당한 주장을 한다.


창세기 3장 4절-5절 

뱀이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려서 너희가 선과 악을 아시는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뱀이 질문한 대상은 여자였지만 뱀의 시선은 아담에게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뱀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던 아담이 그 상황에서 이상한 질문과 주장을 하는 뱀을 추궁하거나 질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은 황당한 질문을 하는 뱀에게 “너는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라고 반문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담은 시청자 모드로 하와와 뱀의 이야기를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듯 보고만 있었다.


[하나님처럼 되다]

뱀의 독은 [하나님처럼 되는 욕망]이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다. 뱀은 어떻게 하와와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을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기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한다고 예상한 것일까? 피조물인 사탄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한 타락한 천사였기에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타락할지를 알고 있었을까?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보니 그 나무의 열매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자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습니다. 


하와는 예능 수준의 뱀의 질문과 기괴한 주장을 반박하거나 교정하는 대신에 선악과에 물끄러미 쳐다보았을 것 같다.  그런데 선악과는 예전에 보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 손을 뻗어서 선악과를 입으로 가져갔는지도 모르게 인간처럼 살아야 하는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그 열매를 먹었다. 혼란스러운 장면은 계속 이어진다. 아담이 정말로 하와를 사랑했다면 그녀가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선악과로 다가가는 하와를 막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진실로 믿고 있었더라면 하와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먹는 대신 받아서 던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예능 프로그램 보듯 계속 이 황당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담은 하와가 정말로 죽는지가 궁금했을 것이고 만약 하와가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선악과를 먹은 하와는 죽지 않았다. 아담은 하와가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기에 그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는 당장 죽지 않는다.

주일 예배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다고 정녕 죽을까?

복음을 한 번도 전하지 않았다고 정녕 죽을까?

바람을 피웠다고 정녕 죽을까?

거짓말하고, 뇌물을 받고, 불의를 행한다고 당장 큰일이 일어날까?

기도와 말씀으로 생활하지 않는다고 정말 죽을까?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정말 내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까?

당장 죽지는 않을 것이다. 사탄의 입장에서도 인간이 죄를 범한 후 바로 죽으면 곤란해진다. 오히려 더 잘되고, 잘 풀리고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뱀의 목표는 아담이었다. 그 효력의 시점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었다. 아마 아담도 선악과를 먹은 하와를 보면서 걱정하며 하와의 변화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이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창세기 3장 6절-7절 

여자가 보니 그 나무의 열매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자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습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옷을 만들었습니다.


선악과의 효력은 아담이 먹고 난 후 즉시 나타났다. 하와가 먹자마자 벌거벗었음을 알게 되어 창피함에 소리를 질렀다면 아담은 절대로 먹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아담은 무슨 생각으로 하와의 호러급 예능을 시청자 모드로 보고 있었을까? 여하튼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라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변명/대안/핑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첫 번째 아담의 카드는 하와가 먹는 것을 본 후 결정하는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죽지 않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커진다. 두 번째 카드는 첫 번째 카드가 실패해도 자신은 피할 와일드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께 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담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라고 제게 주신 그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제게 주어서 제가 먹었습니다." (창3:12, 우리말성경)


하나님은 이 사건에 대해서 먼저 선악과를 먹은 하와에게 묻지 않고 아담에게 이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 모든 것을 시작한 뱀을 지적하지 않았다. ‘뱀이 하와를 속였고, 하와가 저에게 줘서 먹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함께하라고 제게 주신 그 여자’를 지목했다. 아담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죄를 하나님에 전가했다. 아담이 이런 죄의 모험을 했던 이유는 아마도 하와처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넘어가는 경우는 자기 생각을 상대방이 말해 줄 때이다. 사탄은 자기 생각을 무력을 행사하면서 강압적으로 넣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을 그저 도왔을 뿐이다. 

뱀이 하와에게 첫 번째는 멍청한 질문을 했지만, 뱀의 두 번째 속삭임은 유혹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사탄의 질문은 처음에는 어리숙하고 황당해 보여서 하찮게 보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알고 있다. 

이런 황당한 질문은 예수님도 받았다.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됐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6 마귀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 보시오. 성경에 기록됐소. '하나님이 너를 위해 천사들에게 명령하실 것이다. 그러면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붙잡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할 것이다.'" 

7 예수께서 마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또 기록됐다.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8 그러자 마귀는 다시 아주 높은 산꼭대기로 예수를 데리고 가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었습니다. 

9 그리고 마귀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만약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10 예수께서 마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됐다.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 

(마4:3-10, 우리말성경) 



사탄의 시험은 정체성에서 출발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처럼’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으라고 했다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먹으라고 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사탄의 요구는 수준 이하이며 무지해 보인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에게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 얼마나 유치한 발상이다. 겨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 돌빵을 만들어 먹는 것인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두 번째 요청은  더 황당하다. 첫 번째가 유치했고, 두 번째가 황당했다면 세 번째는 민망할 정도다. 창세전 우주의 영광을 경험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면서 경배할 것을 요구했다. 사탄은 자기가 시험하는 예수님을 정말로 하나님 아들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사탄의 이런 엽기 예능에 가까운 질문에 예수님의 질문을 살펴보면 사탄의 요구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말씀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 


사탄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사람이 할 수 없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사람처럼 먹으라고 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처럼 이 땅에서 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으로 40일 금식하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명료하게 대답했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 

예수님은 사람이 진짜 사는 것이 육체로 사는 것도 있지만 이 땅에서 영으로 사는 것을 말씀하신다. 


만약에 하와와 아담이 뱀의 질문과 지시에 이렇게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은 동산의 과실을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는 먹지 않는 거야.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살아가기 때문이야” “뱀아, 하나님 말씀을 시험하지 말아. 뱀은 내 앞에서 사라져라.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는 거야!” 

문제는 하와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우리를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뱀은 여전히 나에게도 똑같은 패턴으로 질문을 한다.  


jeopardy 위험 / 위험한 퀴즈

우리는 평상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질문을 받고 살까?

자기다움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는 자신이 받은 질문의 총합을 살펴보는 것이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자기다움을 파악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며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다움]이다. 일주일 동안 자신이 받은 질문을 모아 보면 상당히 당혹스러워지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받았던 질문들이 대부분 업무와 관련된 일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모든 질문지에서 업무 외에 다른 질문을 정리해보면 대부분 이런 것들이 나온다.

“연봉은 얼마나 받아요?”

“휴가는 어디로 가셨어요?”

“요즘 프로젝트는 어떠세요?”

“아이들은 학원은 어때요?”

“젊게 보이는 비결은 무엇이죠?” 

“요즘 가장 핫한 동네가 어디예요?”

“화장품과 의류는 어떤 브랜드를 쓰세요?”

“맛있는 맛집 소개 좀 해주세요?”

이렇게 자신이 받은 질문을 리스트로 만들어서 다시 읽어 보면 인생은 예능 프로그램 퀴즈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오직 나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있다면 무엇일까? 나는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간혹 자기다움이 너무 인생을 심각하게 만드는 무거운 주제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무겁다고 느끼는 이유는 삶을 살아가기도 힘든데 이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자기다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의 상황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자신을 만족하거나 그 반대로 자기다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자기다움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은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 아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베드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우리를 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이다. 아쉽게도 우리가 지구 안에 살면서 지구의 크기를 느끼지 못하고, 그 지구가 공전하는 태양의 크기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기에 인식할 수 없다.

  그런 위대한(?) 존재에게 위험한 질문을 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하와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끊임없이 엉뚱하고 지적 수준이 떨어진 질문을 한다.  이번에는 내가 혼자일 때 혹은 신앙적 갈등이 있을 때 내 안에서 나에게 했던 질문을 살펴보자.


“이렇게까지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

“예수님만 믿고 이 세상을 살 수 있을까?”

“믿음도 좋지만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도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를 진짜로 인도하실까?”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를 지켜보는 천사들과 하나님을 상상해보자. 아마도 우리는 예능프로그램 퀴즈에 나온 연예인처럼 당연한 질문에 황당하고 엉뚱하며 그리고 듣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의 대답을 할 수 있다. 아마도 천사들은 이런 질문에 사탄이 원하는 대답을 하는 우리를 보는 자신들이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예수님을 보지도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이 어의없어서져 웃을 수도 없는 일이 내 안에서 매일 일어난다.  내가 힘들 때 스스로 하는 질문에 대해 정리해보면, 내가 뜬금없는 질문에 어떻게 힘들어하는지 그리고 유혹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수많은 질문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했던 말씀을 대답으로 대입을 해보자 


 -인간은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 


사탄의 공격은 자기다움을 의심하는 질문이다. 사탄이 원하는 질문의 목표는 [하나님처럼]되기 위한 방법을 우리가 찾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련된 질문의 시작은 자신이 하고 싶었지만 참고 있었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한다. 계속되는 질문은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결국에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성공한 [유명인처럼]되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과 결핍을 느끼게 한다. 사탄의 집요한 질문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욕망을 불어넣는다. 하나님처럼 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나님의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해서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악이라고 정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사람을 판단 및 정죄하고, 상황을 판단하여 자기 스스로 자구책을 찾게 한다. 결국 하나님 없이도 자기가 스스로 존재하도록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없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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