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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수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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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Aug 24. 2019

자기다움에서 예수다움으로(2)

아담의 복원

우측 순서 부터 : 원본, 파손, 복원 



19세기 스페인 화가 엘리아스 가르시아 마르티네스의 프레스코화 ‘에케호모’(이 사람을 보라)라는 작품이 있었다. 2012년 8월 이 작품은 가운데 그림처럼 성당 습기로 망가지는 안타까워하는 신앙심이 깊은 히메네즈 할머니(86세)는 스스로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복원 작업은 결국 오른쪽 그림처럼 형체를 알 수 없는 모습이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인해서 히메네즈 할머니는 벌을 받게 될 지경까지 왔다. 하지만 또 다른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인해서 이 사건은 히메네즈 할머니를 스타로 만들었다.





할머니의 지지자들은 페이스북을 만들어서 할머니의 진심을 알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를 돕기 위해서 ‘에케호모 빈티지’ 포도주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월 피플이라는 벽화 화가들은 할머니를 위한 벽을 세우기도 했다. 그 이후에 갑작스러운 패러디가 나오면서 보르하 당국은 기념 센터를 세웠다. 이렇게 급반전이 된 이유는 바로 할머니가 망친 그림을 보기 위해서 관광객이 몰렸기 때문이다.


성당에서는 망친 그림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1유로 입장료 받기 시작했다. 매년 방문자가 6000명 정도에 그쳤던 마을에 방문객은 꾸준히 늘어나서 2016년에는 5만 7000명에 이르렀다. 망친 그림으로 인해서 상권이 살아났고, 시골 마을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고 급기야 비홀드맨(behold the man)이라는 오페라가 만들어졌다. 


  이 상황은 희극인가? 아니면 비극인가? 사람이 몰려와서 마을이 살아났고 할머니도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희극이지만, 원본은 영원히 복원될 수 없게 된 것은 비극이다. 그런데 원본을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보르하 마을은 그림 원본을 복원시킬까? 본질을 생각해보자. 그림 복원됨으로 인해서 더 이상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복원을 하려고 할까? 이 사건도 현대 사회 문화와 돈이 만들어 낸 예능 프로그램에 가깝다. 







그렇다면 선악과 사건 이후에 인간의 복원을 생각해보자.

선악과 사건 이후에 인간은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복원보다는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도전은 더 스펙타클(?)하고 대범해졌다. 하늘을 닿는 바벨탑을 쌓아서 이름을 날리고 싶은 인간은 인간을 뛰어넘는 초인을 만들기 위해서 인공지능까지 만들고 있는 주이다. 인공지능의 모순은 인간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인공지능을 만들어서 인공지능에게 지배받으려는 것이다. 


 완벽한 인간의 복원은 아담의 복원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보이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처럼(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아닌 것처럼) 돈이 많은 사람과 하나님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처럼 사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처럼 사는 인간의 삶을 보여주었지만, 인간은 사탄이 예수님에게 보여주었던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소유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원본을 망치 히메네즈 할머니 덕분에 돈을 벌게 된 마을 사람들은 히메네즈 할머니를 영웅으로 대우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 원본을 망치 인간들은 돈을 통해서 인간 원본을 만들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과 하와가 궁금하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를 했을까? 그들에게 행복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 받음을 어떻게 경험하고 느꼈을까? (혹시 아담이 즐겨먹었던 과일은 마트에 있을까? 이런 것도 궁금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은 인간을 복원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원본의 복원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구원(복원)할 수 없다. 이 땅의 삶의 목적은 예수다움이라는 구원의 복원이다. 스스로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과 성령님의 양육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는 창조의 그 모습으로 부활되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결정된 구원과 달리 이 땅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복원 과정은 우리가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정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바울 사도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롬 7:15, 새번역) 

I don't really understand myself, for I want to do what is right, but I don't do it. Instead, I do what I hate. (Romans 7:15, NLT) 

바울은 초기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자신의 이런 이중적인 사고방식의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발견한 법칙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롬 7:21-23, 새번역) 


결국, 바울은 육체의 죄의 법을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다. 바울이 말하는 자기다움이란 자기부정에서 시작해서 예수 다움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산 제물이 되는 것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다. 우리는 아담의 방법과 다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처럼 되어야만 한다. 


바울 사도 이후에 인간 복원에 대해서 수많은 연구가 있었고,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믿는 복원의 정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1번의 질문과 대답이다.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이다. 그 대답으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이 질문과 대답이 복원의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 질문과 대답으로 나의 복원 상태를 점검해보자. 


 -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진지하게 그리고 진실되게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님을 즐거워서 기도와 말씀 묵상 시간을 계속 늘리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주신 기도와 말씀 묵상을 특권이라고 생각해서 기뻐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구를 버리고 있는가?  



이것 외에도 복원의 붓칠 같은 질문은 더 많다. 아쉽지만 나의 복원 상태는 하나님만이 알 수 있다. 

내가 스스로 복원을 하기 위한 독특한 방법은 없다. 사람의 이목을 끌기 위한 세상의 것으로 나를 복원시킬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가 복원의 과정이다. 




[이 사람을 보라]

사람들이 이 망치 복원 그림을 보기 위해서 시골까지 찾아간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보는 그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돈이 되는 현대 사회의 문화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며 인간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하셨다. 우리는 구원받아서 이렇게 복원된 모습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할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만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일까? 그들은 어떻게 하면 될까?


 성경은 이 질문의 해결책으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예수님을 보내셨고, 성령님을 보내셨다. 선악과를 먹는 대신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셔서 예수님 안에 거하며, 포도나무와 열매 맺는 가지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원했던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예능과 오락, 자기다움과 남과 다름 

언제부터인지 모르겠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TV 방송에서 개그맨이 주도하는 오락(娛樂) 프로그램을 예능 [藝能] 프로그램이라고 부른다. 원래 예능이라는 말은 오락이라는 말이 아니라 연극, 영화, 음악과 미술의 능력을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능 프로그램을 오락 프로그램으로 의미론적으로 맞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문화 통념에 의해서 예능을 오락 대신에 그렇게 쓴다고 하니 달리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예능의 원래 의미는 이렇게 사라지게 될 것 같다.


 오락이 예능으로 뒤바뀐 것처럼, ‘자기다움’을 ‘남과 다름’이라는 개념이 바뀌어 가고 있다. 현대 사회는 남과 다르기 위한 삶을 살고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을 여러 스펙을 남들과 비교해서 더 높이 쌓는 것이다.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이렇게 스펙을 쌓아서 남들과 다르게 만드는 공장으로 바뀌지는 오래전 일이다. 남과 다르기 위해서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이 시대의 예능[藝재주 예能 능할 능]이 되었다. 자기다움은 남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남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기다움은 자기완성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보내신 아버지의 목적을 순종하여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자기다움이며, 그 완성을 예수다움이라고 한다


주 안에서 자기다움은 자기를 계발, 성장 그리고 완성하는 것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다움은 내가 하나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내가 왜 창조되었고, 내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아는 것이다.


 다시 한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1번의 질문과 대답을 살펴보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다. 


  진짜 사랑을 한 사람은 소요리문답 1번으로 정의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사랑은 한마디로 상대방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소요리문답을 이해하기 위해서 대상에 사람을 넣어서 읽어 보자. [부부의 제일 목적은  서로가 행복하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배우자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부부의 사랑은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내 또한 남편에게 자신이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남편을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 또는 남편은 아내가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아내는 남편이 자신이 남편을 사랑을 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해서 항상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랑을 하는 부부들은 하나가 된 부부이다.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가 되었다. 비록 서로가 자신이 더 사랑하거나 더 사랑받는다고 감사의 말을 나누지만,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1%도 기울어지는 순간에 사랑은 구속이 되어 버린다.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 온전한 부부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될 때야만 비로소 자기다움을 이룰 수 있다.  


   만약에 자신을 위해서 결혼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면 그들의 결혼 생활은 어떠할까? 부모 자신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 밑에 자란 아이들은 어떻게 자랄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사랑을 받을 것을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어때야만 할까?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할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해야 할까? 


    분명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기 위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왜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랑을 하나님께 받았는데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없을까?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무서워 숨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이것이 선악과의 결과이며 저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데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에 어제만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사랑을 나누는 나의 아내와 자녀가 내가 무서워서 집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나의 기분은 어떨까? 내 가족에게 내가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도 여전히 나의 얼굴을 피해서 숨으려고 한다면 나의 마음은 어떨까?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세기 2장 17절) 아담은 당장 죽지 않고 930세를 살다가 죽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명령이 영생이다(요 12:50)’ 이것은 단순히 명령 복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아담은 그 말씀을 버리는 순간에 하나님이 떠나는 죽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별하기 위해 먹었던 선악과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에 어제저녁까지 만해도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사라져 버렸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에 대한 사랑이 어제저녁부터 사라졌다면 자녀를 보면서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영화에서 가끔 뇌의 충격을 받아 기억 상실증이 생긴 주인공을 보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담을 생각해보자. 선악과를 먹은 후에 자신과 하와가 벌거벗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뱀이 선악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생각만 해도 감사하고 기뻐했던 하나님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풀숲으로 숨었다. 아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다. 다른 말로 한다면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


자기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울을 자주 본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을 것이다. 우리 눈이 자주 머무는 곳에 우리의 관심과 애정이 있다. 예수님은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고 하셨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마음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무엇을 보려고 할까? 혼자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떻게 사랑하냐고 물어보면 쭈뼛해한다. 아마도 주일예배 참석, 십일조, 교회 봉사, 아침 큐티, 중보기도 모임, 성경공부 모임을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에게 교회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기뻐하고, 어떻게 사랑하냐고 개인적인 경험을 물어보면 난감해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특별하게 생각하는 하나님과 사랑을 말하기에 자신의 사랑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종교생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 인간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에 목적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 사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신 그대로 내가 행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요 14:31, 새번역)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요한복음 3장 16절) 또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로 선악과 이후에 파괴되고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원래대로 복원하셨다. 


 마치 십자 가위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가 따먹기 위해서 보고 있는 선악과와 대칭되어 보인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나무에서 선악과를 땄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고 싶어 하는 아담과 하와(인간)를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 그들이 쥐고 있는 선악과, 곧 예수님을 선악과나무와 같은 십자가 위에 올려놓으셨다.

  하나님은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서 아담과 하와도 죽었지만, 그 죄를 대신할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죽음을 경험하여만 했다.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던 바로 그 죄의 형태는 어떤 모습일까?  모든 죄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담과 하와의 죄(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마음)를 짊어지신 예수님은 그 죄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32 그들은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34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35 그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하셨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막 14:32-36, 새번역)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놀라며 괴로워했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마음에 근심으로 죽을 지경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하셨다. 예수님 마음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십자가 죽음으로 끌고 가는 인간의 죄를 전가받으신 예수님에게 성령님은 계셨을까? 예수님의 몸에는 죄가 전가되었고 이미 성령님이 떠난 상태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급기야 죽을 정도의 두려움이 임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죽을 정도로 힘든 마음은 바로 아버지에게 ‘이 잔을 옮겨달라는 자신의 뜻’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하지만 가룟 유다와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올라오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에게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겼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피조물로서 생명 유지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려 주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죄를 경험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내 뜻’은 아담과 하와가 먹었던 선악과의 마음, 바로 자신의 뜻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죄[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내 뜻]에 대해서 ’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다시 기도 하셨다. 


 그렇다면 인간의 뜻은 모두 죄성을 가진 악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다른 대안을 제시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죄일까? 에수님은 십자가 외에 다른 대안을 제안했던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살펴보자.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막 8:31-34, 새번역)


사탄의 유혹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 이유는 모두 사람을 위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못하는 이유가 인간이 보기에 불합리한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완전하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명령은 완전하시다. 우리가 내 뜻에 안 맞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다른 안을 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내 기준으로 선과 악으로 판단하려는 아담의 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기를 부인을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십자가의 본질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롬 7:21-24, 새번역) 


자신을 [하나님처럼]되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원죄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셨던 우상숭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너는 너 자신을 위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것이나 무슨 형태로든 우상을 만들지 마라. (출 20:4, 우리말 성경)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신을 창조하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내용을 살펴보자. 


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를 비웃었다. 

15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눅16:13-15, 새번역) 


예수님의 재물관에 대한 입장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재물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만드는 재물, 곧 돈을 사랑하는 마음의 실체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임을 알려주셨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우상숭배를 너무나도 교묘하게 신앙적 활용을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려 섬겼던 현장에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살펴보자. 



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14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엎으셨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1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요 2:13-19, 새번역)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과 ‘주님을 생각하는 열정’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르다. 주님을 생각하는 열정이라면 기도를 하겠지만, 주님이 없는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은 우리를 타락하게 만든다. 십자 가위에서도 죄인을 용서하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혐오스러움을 참지 못하셨다.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신 예수님은 성전 자체의 성스러움을 역겨워하셨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모든 일에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과 열정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인간들이 서로가 인정하면서 거룩하고 성스럽다고 말하는 그 무엇도 ‘하나님만을 생각’하여 기도가 없다면 하나님 보기에 역겨운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는 별도로 자신감 (自信感)으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自身 自信 自神) 감感

아담과 하와는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누구여야만 될까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에게 자신은 이런 존재가 되어야만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그들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自身을 하나님처럼 자신自神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 마블 캐릭터 같은 초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뜻에 의해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택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놀랍지 않겠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하나님처럼 살고 있다. 존재하지만 느낄 수 없는 중력처럼 원죄로 인해서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 하나님처럼 버젓이 잘 살고 있다. 오히려 세상은 자기 계발을 통하여 더 강력한 자신감 (自信感)을 갖도록 독려한다.   

자기 개발서가 인기가 있는 것은 자신이 [누구처럼] 살기 위해서 인생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누구처럼] 살지 않기 위해는 자기 계발이 필요하고, 자기 계발은 자신自信(자기 믿음)을 자신自神(유일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계발 내용은 자신감 (自信感)을 불어넣는 책이다. 이런 책들은 뱀처럼 자신自神이 되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자신(自信)만을 믿으라는 말한다. 자신自身이 생각하는 자신自信을 얻기 위해서 이들이 필요한 것은 결국 끝까지 질문을 통해서 뿌리까지 가면 ‘성공과 돈’이다. 결국 자신을 위해서 가장 확실한 돈을 우상으로 섬기게 한다.

  하나님 사랑이 없어진 인간은 자기 사랑, 자기 연민 결국 자기 염려에 빠져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 나를 비롯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사랑한다. 벗어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호한 결단을 하라고 하셨다.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막 8:34-38, 새번역) 



37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 10:37-39, 새번역) 



우리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다움이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하나님의 품에 있었던 예수님처럼 되는 아버지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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