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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Sep 07. 2019

자기다움에서 예수다움으로(3)

聖地巡禮성지순례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벧전1:17, 새번역) 




내 주변 셀러리맨들은 내가 잠시 휴직이라고 하니깐 엄청나게 부러워했다. 

무급 휴직의 실체가 돈을 받지 않고 잠시 멈춤이라고 말해도 그들은 여전히 부러워했다. 

아무리 말해도 나의 무급 휴직을 유급 휴가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급휴직은 페라리에 기름이 없는 것과 같다고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집의 가장으로 나는 가장직을 내려놓고 집에만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자택 감금]과 비슷했다.  

휴직과 휴가 그리고 휴식은 모두 같은 휴休를 사용하지만 그 질적 차이는 매우 다르다. 

휴직은 일종에 일상의 멈춤 pause에 가깝다고 말해도 지인들은 여전히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부러워하는 지인은 한 달 정도는 여행을 가라고 하지만 나에게 여행은 전혀 의미가 없다.   

여행이라는 것은 타인의 일상에 손님으로 며칠 동안 불쑥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휴양지와 호텔이 있다고 해도, 그곳도 사람의 일터다. 

내가 보는 여행이란 타인의 일상에 들어가서 그들과 다른 삶, 일상이 아닌 일탈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행에 대해서 이런 정의를 하는 나는 다른 사람의 일상 침범과 같은 여행은 매력이 없다.   


나는 13일 동안 계속 아침에 시간제한 없는 생각과 묵상 중이었다.

분명  [가택연금]과 같지만, 나는  [보석석방]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나는 내 일상을 타인으로 관찰 중이다. 마치 천사들이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를 보는 것처럼...

천사들이 보기에 이 땅의 삶은 어드벤처일 것 같다.


놀이동산에 모든 놀이기구는 정상적인 삶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위기와 공포를 만들어내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즐거워한다. 돈을 내고 귀신의 집에 들어가서 무서워하면서 즐거워한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에게 이 땅의 삶은 입장표를 내고 들어가는 놀이동산 혹은 유령의 집에 가깝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우리는 시간이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영생을 사는 우리에게 오늘의 일상은 놀이기구, 사파리 혹은 귀신의 집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삶은 줄을 잘 서야 한다. 내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줄은 무엇을 기다리는 줄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그 말씀으로 살려는 우리의 오늘은 예수님과 신혼여행이며 놀이동산에 놀러온 것 같다. 


가택연금, 자택 구금 그리고 보석 석방이 될 수 있는 나의 무급휴직  

하지만 나의 여행은 오늘도 시작이 되었다. 

공간 여행이 아니라 시간 여행이다.   

나의 여행은 2011년에 썼던 모든 묵상을 다시 읽어 보면서 새로운 여행을 위한 지도를 만들고 있다. 

그것은 [예수다움]에 관한 글이다. 

출판을 목적으로 쓰는 글이 아니다. [예수다움]을 알기 위해서 퍼즐처럼 섰던 글을 다시  맞추어 보거나 없는 부분을 맞추어 보면서 [예수다움]의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다.  


큰 그림은 보았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다면 나는 {예수님처럼]되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지도의 그림이다. 

지금 내가 쓰는 글들은 내 인생을 돌이켜서 경험했던 지형지물을 기억해서 입체적인 지도를 그리는 중이다 



진정한 여행은  

타인의 일상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을 여행하는 것이다. 

친구들과 관광과 먹방 여행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걷는 [말씀 길] 여행이다.  

오늘도 2천 년 전 이 땅에서 살았던 요한을 만나고, 10년 전에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여행일지를 쓴다. 나의 인생의 영혼 여행의 끝은 분명하다. 예수님이시다. 

지금 나는 여행 중이다 


그래서 일기와 묵상이 중요하다 

이것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인생의 과거 및 미래 시간 여행을 할 수 없었다. 



무급 휴직 이후에 치료 목적으로 나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마음으로 내려가지도 않고 5초 만에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무리한 운동 이후에 고관절 염좌로 고생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예수다움]은 은퇴 이후에 쓰려고 했던 것이었다. 주님의 예비하심인지 아니면 나의 충동적인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은퇴 기념 집필 작업을 지금 하고 있다.  

60세를 바라보는 57세에 [예수다움]을 쓴다고 했을 때 걱정했던 것은 글짓기 머리 회전이었다. 

더 두려웠던 것은 막상 쓰려고 했을 때, 내가 모았던 그리고 경험했던 신앙생활에서 쓸 자료가 없는 당혹감이었다. 


그래서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나는 예수다움을 주제로 글을 찾고 생각하고 쓰고 있다. 

은퇴 이후의 예수다움이라는 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내가 알게 된 예수다움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의 이유는 내가 무급휴직으로 은퇴 이후의 삶을 13일 동안 살아보니 은퇴 이후에 [예수다움]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묵상 책 읽기 밥 먹기 묵상 가끔 지난 예능 프로그램 찾아보기 … 이것은 예수 다움도 아니고 자기다움도 아니다 


13일 지난 것으로 판단하기 이르지만 생존 모드에 가까운 절전모드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지금 50년 더 살기 위해서(수명 100세라고 한다면, 이렇게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 성지순례 중이다. 



내 인생의 성지순례, pilgrimage  

pilgrimage의 어원은 peregrinus(외국인)에서 나왔다. 외국인이라는 개념은  per(through 통하여) agrum(field 들판) 들판을 지나서 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지 순례를 하는 사람은 성지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외국인(혹은 외국에 있는 신도)이다. 성지에 사는 사람들은 성지순례를 하지 않는다. 이런 콘셉트로 최근에 유명한 방송 프로그램(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도 있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일상에 대해서 외국인들은 김치와 삼겹살의 성지순례처럼 우리나라의 식당을 찾아다니거나, 한국의 복잡한 지옥철과 교통환경에 대해서 놀라워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마다 수천 명이 자신의 집 앞을 성자처럼 걸어 다닌 외국인을 보는 산티아고 주민들은 돈 내고 고생하여 걷는 그들이 우습고 희한하게 보지는 않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유를 살펴보면 자신을 찾고, 정리하고, 계획하기 위해서 걷는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인생에 외국인(제삼자, 훈수 두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휴직을 주님의 예비하심이라고 믿고 싶다. 

(완전히 믿기에는 휴직 과정에서 나는 겸손하거나 순종적이지 않았다) 

암튼, 베드로의 부인에도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나는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은혜 가운데 허락하셨다고 믿는다.  그렇게 내 멋대로 믿고 싶은 이유는 나의 순례는 주님을 찾는 순례이기 때문이다.  

나의 순례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10년 동안 큐티를 했던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 안에서 역사하셨던 그리고 머무셨던 예수님의 흔적을 찾았다. 잠시 머무셨던 성지가 아니라 성자 예수님을 찾고, 성자 예수님이 지금 거하시는 그 성전에 이르는 것이 나의 성지순례이다.  


출발은 너무나 좋다. (물론 그 길의 어려움과 마지막 도착지는 각오해야만 한다) 

분명 길을 잃고 헤매거나 거북이와 경주하는 토끼처럼 어딘가에 누워서 잘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예수님 안에 도착했다고 믿는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나그네의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무급 휴직 3개월, 이것은 내가 30년 인생을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깨우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했었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나그네로 살아야만 했.  

그래야만 내 인생의 성지순례를 모두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급휴직 3개월,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 속성과정 3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휴직 3일 만에 내 인생이 별거 없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내가 은퇴 이후에 쓰려고 했던 글과 묵상은 3일 동안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빈약하고 뻔한 이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발이 좋은 이유는 이런 상황을 7년 앞당겨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나그네의 삶이 아니라 순례자의 삶으로 은퇴를 7년 동안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축복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9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10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마 10:9-10, 새번역)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를 사탄의 공격을 격멸하기 위한 천국 해병대처럼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를 보내는 것이 늑대 무리에 보내는 양과 같다고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로 그 늑대 무리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나는 휴직 기간 중에 세상의 나그네가 아니라 나의 삶을 예수님과 함께하는 순례자로 변화되고 싶었다.  





영원한 시간을 기준으로 100년이라는 인간의 삶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순간 일 것이다.

나는 그 영원함의 지금을 살고 있다. 

3박 4일 외국 여행의 첫번째 아침은 항상 낯설고 신비하다.

나의 지금 삶도 그렇게 신비하고 싶다. 내가 그 신비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나그네(여행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예수님처럼 나그네로 인생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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