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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Sep 13. 2019

자기다움에서 예수다움으로(4)

하나님다움, 예수님다움

사탄은 인간의 음식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선악과를 먹어 보라고 했다.

광야에서 사탄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어 보라고 했다.

사탄이 우리를 음식으로 유혹하는 이유는 이처럼 먹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인간도 이 땅에서 사는 동물을 육식 동물, 채식 동물 그리고 잡식 동물로 나누었다. 사탄도 인간을 먹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사탄에게 사람은 말씀을 먹는 사람 그리고 말씀을 먹지 않는 사람밖에 없다. 사탄에게는 인간은 이렇게 딱 두 종류밖에 없다.


  사탄이 하와와 아담을 속이기 위해서 [하나님처럼]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했다. 뱀의 유혹을 자세히 살펴보면 선악과를 먹게 된 이후의 결과는 그렇게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절대로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 일뿐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과 악’을 아는 것이 어떤 매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엄청난 힘을 갖게 된다고 하거나, 존재가 업그레이드된다는 말로 뱀은 그들을 유혹하지 않았다. 왜 ’ 선과 악’을 아는 일이 하와와 아담에게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을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사건을 단순히 사춘기 청소년에게 나타나는 우발적인 반항처럼 창조주께 대항한 사건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사탄은 깊은 생각과 기회를 살펴보면서 아담을 무너트릴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드디어 사탄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 자신이 받게 될 모든 결과에 대한 대가 지급의 각오를 하고 하와에게 접근했다


오직 한 번의 유혹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만든 창조물을 망쳐야만 했다.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이 사건에 대한 퍼즐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피조물에서 느끼는 차이점은 선과 악을 아는 것일까? 만약 선과 악을 안다면 무엇을 보고 어떻게 알았을까? 상상력을 동원해서 상황을 이렇게 그려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외에도 하나님을 보좌하고 있는 천사들과도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 천사와 말을 하면서 타락한 천사의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상상이다) 인간도 같은 피조물이기에 타락한 천사의 동기나 결과에 관해서 관심을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아담이 타락한 천사를 보았거나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자는 예수님 앞에 직접 나타나 시험을 했다. 반면에 하와에게 나타나서 시험한 존재는 사탄이 아니라 뱀이었다. 사탄(타락한 천사)이 아담 앞에 나타날 수 없어서 뱀을 시켰는지 아니면 사탄이 아담과는 구면이 있기에 나타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탄은 하와가 숲속에서 종종 보았던 뱀을 활용했다.


  아담이 가장 궁금한 것은 무엇일까? 사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들었다면) 무엇을 염려했을까? 이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해서 뱀의 유혹에서 찾을 수 있다. 첫 째는 죽지 않는다. 둘 째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담은 자신과 하나님의 차이를 [선악을 아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왜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스스로 믿었을까?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은 이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받고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지었다. 한마디로 이 땅에서 만큼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아담이 왜 굳이 [선악]을 분별하고 싶어 했을까? 아담이 하늘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하나님처럼]되고 싶어 한 것이 분명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였고, 먹으면 ‘죽는다’라고 했다. 아담은 죽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이름을 지어 주었던 생명체들이 죽은 것을 보았을까? 아니면 하나님에게 죽음이 무엇인지를 질문했을까? 아니면 가브리엘과 같은 천사들을 만나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타락한 천사의 사례를 들었을까?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했던 하와에게 자신이 이름을 지어주었던 뱀이 ‘절대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아담은 하와가 주면 먹기로 결심한 것 같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었다. 아담이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선악을 구별하는지 보자.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 사건은 불가항력적 사고임을 하나님께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여자만 주지 않았다면 저는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담의 죄에 대해서는 법률용어로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 willful negligence, dolus eventualis / 자기의 행위로 인해 어떤 범죄 결과가 일어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 결과의 발생을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라고 한다. 여하튼 아담은 그 죄의 근원을 여자, 더 나아가 여자를 창조한 하나님을 악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악하다고 판단한 인간의 선언은 결국에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게 만들었다. 


사탄이 원했던 것은 자기가 다스리는 뱀이 ‘죽지 않는다’라는 말을 믿고 앞뒤 가리지 못해서 선악과를 먹은 지질한 인간의 타락이 아니다. 사탄이 이런 불장난을 하고 싶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무너트려고 했을까?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이 노린 것은 하나님이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막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까지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을까? 


사탄은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인간이 하나님 때문에 선악과를 먹을 수밖에 없다고 말할 때 자신이 이겼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처럼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이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타락은 아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이 무엇일까? 사탄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 모든 사건의 해결은 하나님의 죽음, 곧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와가 아담이 먹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는 아담과 하와가 죽지 않고, 바로 하나님이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죽음의 대가로 부활 생명을 다시 아담과 하와인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사탄이 부정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가 아닐까?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요일 4:7-12, 새번역)


사탄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하나님을 무너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징계함으로 하나님 사랑의 한계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아담과 하와가 타깃이라면 너무나도 시시한 게임이다. 

사탄이 보고 싶었던 하나님은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을 파괴하려고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 다움, 곧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예수다움으로 하나님이 되셨다. 

인간이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한 피조물로 보지 않으셨다. 자신의 자식처럼 끝까지 사랑하셨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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