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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Sep 21. 2019

자기다움에서 예수다움으로(5)

자기다움의 질문과 대답

기자가 대통령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나에게 하나님께 질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첫 번째’ 질문으로 무엇을 할까? 갑자기 나에게 마이크가 왔다면, 아마도 나는 당황해서 이런 질문을 했을 것 같다.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까?" (이런 초신자들이 하는 질문을 하다니 ..나는 당황해서 다시 질문을 했을 것이다.

"아 ... 제 질문은 우리의 가족은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까?" (나는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일까?"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뭘 정리하려고?) 그러니깐 제 말은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쯤(정확한 시간을 묻고 싶지만)하실 계획을 갖고 계시는가요?" "정확한 시간이 대외비라면 ... 대충 언제쯤 생각하시나요?" 


이런 나의 질문은 나의 신앙 수준과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변화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의 출현으로 당황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한 것처럼, 나의 질문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하는 베드로와 비슷한 수준이다. 만약 바울 사도에게도 이런 질문의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어떤 질문을 했을까? 질문은 질문하는 자신과 대답하는 상대방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나게 한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받은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19장 16절)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께서 ‘천국 입성 비법’을 남들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주변에 많은 율법 학자 및 종교계 지도자로부터 받았던 계명을 모두 지켜있었던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부자 청년은 어느 정도 재력가 및 권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주변에 있는 종교인들도 그에게 호의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좋은 것(쉬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식의 계명을 소개했을 것 같다. (요즘 대부분 교회는 부자가 십일조를 내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인정해 준다.)하지만 그의 영혼은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찝찝하고 무거운 그 무엇이 자신의 영혼을 누르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서 다른 종교 지도자에게 물었던 것처럼, 예수님에게 구원에 이르는 선한 일을 물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처음 질문에는 다른 종교 지도자처럼 십계명을 말씀해주었다. 그러자 청년은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예수님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네 소유를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자신이 부자 청년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부자 청년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선생님에게 이런 도전적인 제안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예수님도 자신을 찾아와서 질문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제자로 파격 채용을 제안한 경우도 없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율법을 지켰다. 하지만 그렇게 갈구했던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놓치게 되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변에서 항상 만났던 그렇고 그런 율법 선생님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에 부자 청년이 자신을 따르는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이제부터는 나의 상상이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네가 찾는 영생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하지만 예수님이 영생 그 자체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시험은 여전히 계속된다. 성경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난감한 질문을 뽑으라고 한다면, 세례 요한의 질문일 것이다.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요한은 자기 제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19 주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게 하였다. (눅7:18-19, 새 번역)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자기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사촌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내가 신발 끈을 묶어드릴 수도 없는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흔들린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무엇을 알렸기에 세례 요한은 이런 질문을 했을까?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이 말씀으로 치유된 것,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밀 이삭을 자른 것 그리고 세리부터 시작해서 어부를 자신의 제자로 부른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을 할 만한 설명이 아주 짤막하게 나와 있다.


33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군요.”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을,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하게 할 수 있겠느냐? (눅5:33-34, 새 번역)


아마도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출현하시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던 세례 요한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지이었지만 자신의 종교 사업은 어느 정도 잘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천국 임재를 외쳤던 세례 요한의 설교는 거슬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세례 요한이 지목했던 예수님의 행보는 메시아라고 생각하기에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만 저질렀다. 일단 갈릴리 사람이었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세례 요한과 그 제자 들고 충실히 지켰던 금식에 대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지키지 않으셨다. 그러자 사람들은 ‘금식’으로 세례 요한의 제자와 바리 세파를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자기다움(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은 ‘우리 다름’의 이유로 ‘우리 다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바리 세파 사람들은 사사건건 자신들의 신앙을 공격하는 목수 출신의 예수님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제사장 아들이었던 세례 요한을 자신의 편으로 동질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금식’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놀랍게도 아담과 하와가 무너진 것처럼 세례 요한도 무너졌다. 


20 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선생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21 그때에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을 많이 고쳐주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23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눅7:20-23, 새번역)



만약에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에게 에덴동산의 그 뱀이 옆에 있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예수님이 정말 그리스도인가?” 뱀은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뱀은 어떻게 그의 대답을 유혹의 도구로 활용했을까? (하와에게 했던 것을 기억하자. 사탄은 패턴을 가지고 있다.)


“물로 세례를 주는 너와 너의 제자는 금식하는데 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그는 금식하지 않을까? 그리고 말이야, 너는 헤롯의 죄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다가 이렇게 감옥에 들어왔지만, 너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세례를 준 적도 없단 말이지. 내 생각에는 둘 중의 한 명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너의 말대로 곧 오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여 금식하는 너와 너의 제자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그 대가로 죄인들과 동네마다 잔치를 벌이고 있는 예수와 제자 중에 누가 참 제자일까? 일단 다른 것은 다 집어치우고 하나만 생각해보자고. 지금 네가 증거 한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어? 왜 예수님은 너처럼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세례를 주지 않지?” 

"너처럼 말야 ...목숨을 걸지 않지?" ....


결론부터 말하면 세례 요한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정확히 몰랐던 것 같다. 세례 요한은 자기 말대로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라고 말했지만, 정작 쇠함을 당하자 인간적으로 흥하는 예수님을 ‘대박 터트린 예언자’로 착각 했다. 세례 요한 앞에는 두 명의 메시아가 있습니다. 한 명은 자신이 믿고 싶은 메시아,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메시아 예수님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자신의 믿음과는 다르게 일하는 사촌 동생 예수님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걸려 넘어진다’의 헬라어는 스칸달리조, 함정에 빠지다, 덫에 걸린다는 뜻이다.  유능한 사냥꾼은 짐승이 자신이 항상 지나다니는 길목에 덫을 놓는다. 인간과 하나님의 순종과 사랑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선악과를 사탄은 교묘하게 죄의 기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방식은 사탄의 고전적인 방식이지만 인간에게 제대로 먹히는 방법의 하나다.  사탄이 사용하는 시험의 소재는 두렵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을 타락시키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실험 도구로 활용한다.


사탄은 우리가 익숙하고, 편하고, 이해가 되는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우리가 만들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만든 하나님을 믿게 한다. 그런 하나님은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지만, 사탄이 내 조정을 조정하는 것이다. 바로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만든 우상이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위기는 예수님이 덫이 될 때다. 사탄은 그것을 노린다.


사탄이 진짜 노리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세례 요한이 죽었고, 예수님의 행보는 더욱 강력해지셨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수천 명을 먹이신 후에 

제자들에게 질문으로 신앙 점검을 했다.


15_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_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 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7_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되다. 네 혈육이 이것을 네게 알려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다. 18_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니, 지옥의 문이 이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 16:15-18, 쉬운 성경) 


교회에 출석하는 대부분 사람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 기독교인은 생활에서는 자신의 대답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어보실 때가 있다. 재정이 어렵고, 병이 들어 있고, 배신을 당하고, 기도 응답이 되지 않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경험한 예수님처럼 나와 전혀 관계없는 분처럼 느껴진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때 나는 예수님은 여전히 나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외워서 대답하는 것과 관계를 통해서 증언하는 것은 다르다.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깨우침의 상황으로 인도해가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알고 있는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주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요나의 아들 시몬은 주님의 베드로가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대답만 했는데 ‘반석’이라는 자기다움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자기다움의 목표는 주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님이 우리를 누구라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은  베드로의 자기다움 위에 교회(우리다움)를 세우신다고 하셨다.


 자기다움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대답하고 대답에 맞는 순종이다.



베드로도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생각대로 예수님께서 다르게 행동하려고 하자 세례 요한처럼 행동이 급변했다.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반드시 가야만 하며, 거기서 장로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율법학자들에게 고난을 받아 결국엔 죽임을 당하지만 삼 일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렸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예수님께서 돌아서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오직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 16:21-23, 쉬운 성경)


헬라어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화를 내면서 말했다고 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 대들었다]라는 말을 ‘에피티마오’라고 적어 놓았다. 이 뜻은 [꾸짖다, 강력히 책망하다]라는 뜻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꾸짖는 하극상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명령에 죽음으로 순종하려는 예수님에게 반대하는 베드로는 어떤 존재일까? 창세기로 돌아가 보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창세기 3장 4절 이렇게 말한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거짓말을 했다. 이 상황이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서 묘하게 일치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을 강요하는 베드로의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던 때보다 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오직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 16:23, 쉬운 성경)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 전만 해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새 이름뿐만 아니라 엄청난 교회 권세도 주었다. 이런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꾸짖는 것은 너무 과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예수님 자신이 조금 전에 세워 주셨던 인물에게 돌연히 하나님의 적인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무 성급하게 축복하신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베드로가 축복받은 이때는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무너트리는 최적의 시점이다.

 베드로가 순식간에 사탄이 된 것일까?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모든 것은 사탄일까?


 아니면 요한복음 13장 27절(그가 빵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말씀처럼 사탄이 베드로에게 들어간 것일까?


 예수님은 사탄이 된 베드로를 꾸짖은 것인가? 아니면 베드로 안에 있는 사탄을 꾸짖은 것일까? 베드로의 연약하고 무지한 마음을 사탄이 이용했을까? 분명한 것은 이 사탄의 목적은 예수님을 넘어트리기 위함이다.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을 반대했다고 사탄이라고 지목받은 경우는 베드로가 처음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말라고 하나님의 일에 이의를 제가 했던 아브라함, 자궁에서 이미 지명된 야곱을 축복해야 하는 데에서 축복하려는 이삭, 자신은 능력이 없다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나님에게 대안을 제시했던 모세, 하나님에게 보다 확실한 증거를 구하는 기드온, 성령님이 막을 때까지 아시아 선교를 강행했던 바울 등.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자기 뜻을 끌고 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이 자기 뜻을 반하는 사람에게 ‘사탄’이라고 한 적은 없었다. 예수님은 베드로라고 새 이름을 주고 사탄이라고 야단쳤던 시몬에게 또다시 사탄이라고 꾸짖지 않았다.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이미 용서하셨고,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양을 돌보라고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했던 것은 광야 시험에서 사탄을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제안받았을 때이다. 베드로에게 생각을 준 것은 바로 이 사탄이 아닐까? 


  사탄과 인간과의 협력과 대립 관계에 해석의 문제가 심각해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은 여기까지로 정리하겠다. 하지만 이것만 생각해보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 하나는 악마이다." (요 6:70, 새번역)  

    가룟 유다는 원래 악마일까? 아니면 악마가 되어는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할리우드 호러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아서 악마에 대한 생각이 좀비 및 뱀파이어와 섞여있어 혼란스럽다. 분명한 것은 가룟 유다는 사람이었고, 제자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 구원을 방해하는 존재는 사탄이다. 

계시록의 말씀을 살펴보자.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유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계 2:9, 새번역)


베드로 사건에서 말하고 싶은 사탄의 집요한 질문 패턴이다.  하와가 뱀의 첫 번째 질문에는 받은 말씀대로 대답했지만,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한 매력적인 두 번째 제안에는 무너졌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금식 시험이 끝났지만, 진짜 마귀의 시험은 그다음부터였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뱀의 어처구니없는 질문과 제안에 하나님 뜻에 불순종했듯이 , 베드로도  사탄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이신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보았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예수님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는 절대로 고난을 겪고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믿고 싶은 예수님의 모습을 내가 만든다.

내가 믿고 싶은 예수님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예수님이다. 그래서 진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당혹스러워한다.

진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신의 제자가 되라고 하셨고,

진짜 예수님은 금식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죄인들이 베푸는 파티에 참석하셨고,

진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하셨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일까? 내가 만든 예수님일까?

최근에 예수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질문과 대답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항상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과 좋은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는가?


그런데

나는 지금 누구에게 질문을 하는가? 그 질문의 내용은 도대체 어떤 수준이고 어떤 방향일까? 

내가 만나고 싶은 예수님인가? 나를 만나고 싶은 예수님인가?

내가 만든 예수님인가? 나를 창조하신 예수님인가?


나는 하나님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질문이 아닌 기도를 하고 싶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를 인도하소서. 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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