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다움, 나의 이름
나에게 맞는 이름
이름에 맞는 나
나에는 맞는 이름을 짓다.
어쩌다 보니 나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태어나면서 갖게 된 이름은 조태현曺台鉉이다. 이름에 뜻은 없었고 항렬자 [현鉉]을 써야 했기에 태台를 넣어서 만든 이름이다. 조태현은 사주팔자를 근거로 점집에서 받은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조태현]보다는 운명(숙명, 나는 소명이라고 말하고 싶다)처럼 갖게 된 [권민]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권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2000년도에 이랜드를 퇴사하고 [패션인사이트]라는 주간지에 기사를 쓰면서 받은 필명이다. 패션 산업의 낙후와 대형 유통 적폐에 관해 8번의 심층 취재와 연재를 위해 만든 [임시 사용 코드명]이었다. 권민이라는 필명은 8번 연재 기사와 함께 사라질 이름이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기사를 90번(2년 6개월) 연재하게 되었다. 그 연재 기사가 끝나갈 무렵에 나는 [권민]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조태현이라는 이름으로 33년까지 살았고, 33살부터 지금까지 권민이라는 필명을 본명처럼 사용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권민]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작명 경험은 처음이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어떻게 이름을 지어야 할까? 정체성의 완전 변혁(기업에서 혁신이라고 한다)을 위해 성씨 [조]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이미지가 가장 잘 맞는 성씨가 있다면 무엇일까? 김, 이, 박, 최 … 이름은 트렌드하게 지을까? 아니면 영어 이름으로 할까? 이렇게 고민을 하다가 성씨는 어머니의 성씨 [권 權] /권세 권] 으로 하기로 했다. 만약 내가 미래에 되고 싶은 사람을 이름을 지으라고 한다면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이것도 어렵지 않게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에게 지어주는 이름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이유는 다시 생각해보면 얼굴 뜨거운 과대망상 때문이었다. 아브람에게는 아브라함, 야곱에게는 이스라엘, 시몬은 베드로 그리고 사울은 바울이 되었던 것처럼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줄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계속 하나님에게 새 이름을 달라고 우기고 떼를 썼다. 솔직히 ‘권민’이라는 이름은 주님이 주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바위라는 의미를 가진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을 때는 어떤 의미(의도)였을까? 내 생각에 베드로의 어부 생활 및 제자 생활로 본다면 그에게 ‘반석’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부 베드로가 원했던 새 이름으로 자신의 꼭 잡고 싶었던 ‘고래’ 정도가 적당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뱃사람에게 반석보다는 태풍, 고래, 바다가 더 어울릴 것 같다. 반석보다 푸른 바다가 더 어울리기 않았을까?
암튼,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불렀던 시몬이 어떤 사람인지는 사탄이 잘 알고 있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32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눅22:31-32, 새번역)
사탄은 예수님에게 “내가 사도 중의 한 명, 그러니깐 베드로라고 부르시는 시몬이 진짜 반석 믿음인지 망치로 찍어 보겠습니다. 시험을 허락해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부른 시몬을 ‘밀 껍질’정도로 생각했다. 비록 시몬이 베드로라는 이름에 맞지 않은 믿음을 보여주었지만, 그 이름은 예수님이 시몬을 대하는 믿음이었다.
어머니의 성씨인 권(권세)의 의미가 마음에 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힘이 아니라 영향력이었고, 그리고 그 영향력의 근원은 ‘말씀’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말씀의 권세를 받을 만한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를 고민했다. 말씀에 영감을 받아 글을 써서 영향을 주는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정할까? 현재 나를 정의 및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이라면 쉽게 정할 수 있었지만, ‘감히’ 예수님께서 인정해주실 수 있는 이름을 짓기란 너무 어려웠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에스겔 47장 1절부터 10절에서 콘셉트를 정했다. ‘성전에서 흐르는 물’은 내가 원했던 영향력이라는 의미와 잘 맞았다. 그래서 나의 이름을 민(물 흐를 민)이라고 정했다. 내가 나를 정의한 이름은 권민(權 :권세가 흐르다, 말씀이 흐른다)이다. (이 이름이 너무 좋아서 나는 나의 필명으로 아들 이름을 지었다. 아들의 이름은 조권민이다.)
아마도 ‘자기다움’에 대해서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때가 바로 내가 나를 정의하려고 했을 때인 것 같다. [권민]은 ‘나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누구여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계속 던지면서 만난 또 다른 조태현이었다. 권민은 조태현의 과거로 얻어진 캐릭터는 아니었다. 권민은 조태현의 스펙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인물로서 미래가 아닌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처음에 낯 뜨겁게 거창한 이름인 권민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흐른다’을 지었을 때는 부끄럽고 창피했다. 멋진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후진(?)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 멋진 이름을 가질만한 스펙과 결과물은 없었다. 하지만 8번 연재 이후에 사라질 인물이고, 그 누구도 권민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을 것이기에 부담 없었다. 나와는 맞지 않고 앞으로도 어울리지 않을 이름이지만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민 끝에 나는 나에게 ‘권민’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새 이름을 짓는 과정에 특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시몬을 베드로로 이름을 바꾸어 주실 때 일어났던 주님의 기이한 그런 이벤트는 없었다. 하지만 20년 동안 [권민]으로 살았던 인생을 돌이켜보면 [권민]이라는 이름은 조태현의 삶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나의 시야를 넓히고 밝혀준 주님의 은혜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조태현]과 [권민]의 삶은 완전히 다른 삶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권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태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권민’이라는 역할을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처럼 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어떤 배우가 극 중의 인물을 너무나 잘하면 사람들은 배우의 이름 대신에 극 중의 인물 이름으로 그 사람을 부른다. (나는 2000년에 방영된 태조 왕건 드라마에서 궁예로 나온 배우의 이름이 김영철이라는 것을 지금 알았다) 그러나 내가 느꼈던 권민은 가상의 극 중의 인물이 아니었다. 나는 [권민]의 이름으로 패션인사이트 신문사와 약속했던 8회 연재를 끝냈고, 그 이후에 [권민]으로 90회 연장 기사를 쓰면서 진짜 [권민]이 되(어 갔다)고 싶었다. 왜냐하면 조태현안에서 권민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2000년도까지 점집에서 지어준 조태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조태현이 누구인지 몰랐다. 조태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권민의 오마주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던 세례요한이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다. 세례요한은 성경의 말씀대로 광야에서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던 사람이다. 부끄러웠지만 나는 세례요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흘려보내는 존재, 권민이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조태현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싶은 권민이다. 나는 세상의 권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권민이 되고 싶었다.
조태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내가 권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려고 할 때, 가장 눈치보이고 부담스러웠던 것은 주님의 인정이었다. 예수님은 시몬을 반석이라고 보았지만, 사탄은 시몬을 밀 겨처럼 보았던
것처럼, 자칭 권민[권세있는 말씀을 흐르게 한다]이 되고 싶어서 스스로 권민이라는 사람을 흉내 내는 내가 스스로 창피했다. 과연 하나님께서 자칭 [권민]을 진짜 [권민]이라고 인정을 하실까? 부끄럽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 권민이 되고 싶었다. [권민]은 이름이 아니라 나의 부끄러운 간구 제목이었다.
나의 기도제목은 [권민 -‘성전에서 흐르는 물’-처럼 살고 싶습니다]이다.
이름값과 이름처럼 살아간 사람도 더러 있다.
디모데의 의미는 [하나님을 공경한다]
노아는 [위로]
누가는 [빛나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심]
사가랴는 [여호와는 기억하신다]
그러나 이름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성깔 부렸던 요나의 의미는 [비둘기]이다. 그리고 왕 중에서 가장 절망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울의 의미는 [희망]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극히 죄인 중에 괴수이며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했던 바울의 의미는 [작은자]이다.
예수님은 반석이라고 불렀고 사탄은 밀 겨라고 불렀던 시몬은 자신을 베드로(반석)이라고 소개할 때 어떤 기분일까?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큰 아버지-태어날 때 받은 이 이름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라고 말할 때 얼마나 창피했을까?
나는 조태현으로 살고 싶지 않다.
정말 권민이 되고 싶다. 권민이라는 이름처럼 살다가 주님을 만나고 싶다.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는 나에게 ‘너의 이름은 [권민]이다’라고 말씀해 주시길 기도한다.
스스로 이름을 지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름이란 ‘관계’의 결정체이다. 그냥 멋진 이름을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의 고민과 결정하에 이름을 짓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이름이 자기다움의 결정체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대해서 관심 있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인간들에게 자신을 명확히 알려주는 이름에 관해서 결정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정의할 때 인간과 하나님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는 개념을 인간에게 알려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든 우상과도 구분할 수 있는 정의일 것이다.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름, 하나님의 자기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름으로 하나님은 어떤 이름을 정하셨을까? (계속)
13 모세는 하나님께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할 때 그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1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여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라고 말이다." (출3:13-14, 우리말성경)
스스로 있는 존재와 스스로 있지 못하는 존재.
나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