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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Oct 19. 2019

자기다움에서 예수다움으로(7)

자기다움에서 자기 이해로

 구약을 읽어보면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까지는 하나님의 출현이 잦았다. 그러나 총리가 된 요셉의 초청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피신하고 400여 년 동안 하나님의 출현은 공식적인 기록에는 없었다. (요셉도 하나님을 대면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가뭄으로 피신한 애굽은 강력한 절대권력이 강력한 종교를 기반으로 세워진 곳이다.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400년 종살이를 하면서 조상들에게 들었던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을 전설처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를 잊혀갈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는 상상할 수 없고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 앞에 서 있었다.


13 모세는 하나님께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할 때 그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1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여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라고 말이다." (출 3:13-14, 우리말 성경)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이해시키는 개념은 ‘스스로 있는 자’, 존재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자기 정의에 의하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아담은 선악을 구별하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지만, 모세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모세는 그동안 애굽과 이방인들에게 신과 인간의 구분을 ‘능력’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창조의 신-아툼, 태양의 신-라, 사랑의 신- 하토르 등등. 모세 입장에서 [스스로 있는 분]의 능력에 대해서 감이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는 불에 타지 않는 떨기를 다시 한번 쳐다보면서 속으로 ‘스스로가 뭐라고요? 그것이 뭐죠?’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모세가 ‘스스로 있는 하나님’의 개념을 이해했을까? 하나님은 이해하지 못하는 모세에게 ‘다시’ 자신의 이름을 설명하셨다.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출 3:15, 새번역)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셨다. 모세는 400년 동안 조상들의 입에서 내려왔던 그 하나님을 만났다. 

인간의 자기다움의 자각은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란 무슨 의미일까?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자에게 ‘자기다움’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있을까? 예수님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신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 5:36, 새번역)


그러니깐, 인간의 존재 자기다움은 이것이다. 지식과 기술의 발전으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일지라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피조물로서 인간의 자기다움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함에서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의 자기다움은 지금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그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해야만 알게 된다.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할 수 없는 이런 미약한 존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마 10:30, 새번역)


사실상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자기다움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자기다움이라는 단어 대신에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그 존재를 인식할 때만 자기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될 수 없지만,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과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다움이 아닌 자기 이해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1_"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2_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다듬으신다. 3_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해 준 말 때문에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_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요 15:1-4, 쉬운 성경)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이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못하는 나약하고 유약한 실체를 인정하고 자기를 폄하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아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우리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16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전 3:16-17, 새번역)


선악을 알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아담은 ‘스스로 존재함’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줌으로 우리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구분 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애초부터 스스로 존재함이라는 묵시적 의미가 있는 ‘독자적’ 의미의 자기다움이라는 개념은 없다. 그래서 내가 말한 자기다움은 예수다움을 이해한 자기 이해다. 포도나무 가지에 포도 열매가 맺어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다움 안에 있는 자기다움이다.




이름은 관계이다.

 부모가 지어 주신 나의 이름은 [조태현]이다.  이름 창녕 조 씨 시조(始祖)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살았던 조계룡(曺繼龍)에서 시작되었다. 조태현과 조계룡의 관계는 성씨 조曺로 2500년 동안 연결됐고, 창영 조 씨로 연결된 조계룡의 후예들은 나를 포함해서  현재 우리나라에 366,798명이 있다. 조계룡의 출현은 정확한 기원 없이 겨드랑이 밑에 조曺가 있어서 진평왕이 성씨 조曺를 주었다는 설화만 있다.

 반면에 내가 필명으로 쓰고 있는 [권민]의 성씨 권(權)의 시조는 원래 김 씨 성을 가진 신라 왕족이 고려 태조를 도와서 대승을 해서 받은 성씨라고 한다. 태조는 그에게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하였다(能炳幾達權)” 뜻으로 권(權)을 성씨로 주었다. 신라 왕족이었던 김 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권행(權幸)이라고 개명했다.

 비록 내가 성씨 조曺를 쓰고 있지만, 진짜 조계룡의 후예일까? 내가 진짜 조계룡의 후예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수많은 역사적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권민의 권은 성씨 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나의 뿌리는 조계룡과 권행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이시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 뿌리와 줄기 그리고 잎에서 양분을 모아 포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권민이라는 이름은 이런 ‘가지의 기능’을 말할 뿐이다. 권민은 내가 주님께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이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의 이름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려 주셨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 1:21-23, 새번역)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예수님답게(예수님 다움)되어서 영광 받으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 곧 임마누엘 이름을 믿고 순종하여 사는 삶이다. 그것만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서’를 드리는 기도의 순종이다. 그렇다면 임마누엘 예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설명하신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이름을 어떻게 알려 주셨을까? 


8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요 14:8-11, 새번역)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인간들에게 설명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자기 일, 바로 인간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다. 이름은 구별과 구분이 아니다 증명과 증거이다.

예수 다움의 증거는 내 삶에서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답게 섬긴다는 의미는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며 나의 존재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일을 할 때, 나는 비로소 권민이 될 수 있다.


나는 권민이 되고 싶다. 



찢긴 구름 사이로 보이는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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