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예수다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민 Oct 26. 2019

시냇가에 심은 나무(1)

가장 큰 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 

우주 과학자는 우주 창조와 또 다른 생명체를 찾기 위해 보이저호와 같은 우주선을 다른 은하계로 발사하여 신호와 증거를 찾습니다.

기독교인 우주를 만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찾기 위해 성경을 연구합니다.

저는 기독교 우주 과학자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이번 주제는 하나님의 내로남불(?)이라할 수 있는 도발적 나눔을 하려고 합니다.

내로남불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자신 기준(기분, 상황, 편이)에 따라서 원칙과 평가가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로남불은 비약이지만 이런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구약과 신약의 입자 차이입니다.

하나님과 주님의 입장차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과감하네요. 


14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겨레로부터 제거될 것이다.
15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이렛날은 나 주에게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출31:14-15, 새번역)


어떤가요? 과연 우리는 이런 높은 기준의 안식일을 지킬 수 있을까요?

자신들의 조상 실수가 바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하나님의 안식을 지키는 바리세파와 유대 리더들.


그 리더들 앞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했습니다.

9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10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13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다. 14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마12:9-14, 새번역)


그러니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율법대로 행동했던 것뿐입니다.

그런 유대인에게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 마가복음 2장 27절까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시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1 그 무렵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기 시작하였다.2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4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단에 차려 놓은 빵을 먹지 않았느냐? 그것은 오직 제사장들 밖에는, 자기도 그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5 또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책에서 읽어보지 못하였느냐?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마12:1-8, 새번역)


인자는 안실일의 주인이다….

음 ..그러니깐 주인 마음대로인가? … 내로남불?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면 죽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것이며 그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바리세파와 유대 리더들이 과연 그것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이중잣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우리는 지킨다는 것은 실제 어떤 날이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려는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누는 시간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생명을 위한 영의 공급을 의미하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최소 생존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이 하나님께 어떤 영광을 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쉬셨으니 우리도 따라 쉰다고 자연과 역사가 갑자기 바뀔까요? 우리의 쉼이 대단한 변화를 일으킬까요? 

안식일 ... 쉼의 본질이 중요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쉼'이 아니라 영적으로 '숨'쉬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을 믿기는 하지만 이해와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쉼이 숨이 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죠. 

안식일을 지키는 계명, 안식일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말씀)을 지킴으로 우리는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보다 더 큰 계명


가장 큰 계명? 왜 우리는 그 계명을 지켜야 할까? 먼저 사람이 지켜야 하는 가장 큰 계명을 살펴보겠습니다. 


28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30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2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34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막12:28-34, 새번역)


이 사건에서 신앙적으로 많은 것을 고민하게 됩니다.

안식일은 그냥 지키면 됩니다. 먹지말라는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되는 것처럼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계명은 지키는 것 이상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이 계명을 지키려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첫째,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둘째,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셋째,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라고 계명만 주셨죠.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신다는 말이 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정말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리고 의식해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불같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가지고 구원을 결정하신다면, 저는 시험과 좌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성모독스럽고 불경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 읽기가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저보다 이 계명을 더 잘 지킵니까?

당신은 그것을 의식하여 하루에 몇 번을 지킵니까?

이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가짜가 아닐까요?

하나님은 안식일 보다 지키지  어려운 계명을 왜 주셨을까? 못 지키는 것을 알면서 왜 그러셨을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실까요?


요즘 말로 말하면 하나님은 너무 자기애가 강하신 것이 아닐까요? 이런 거북한 마음이 계속 마음에서 튕겨 나옵니다. 피조물에 이런 어려운 계명을 주신 하나님 자신에게는 어떤 계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어려운 계명을 주셨다면 하나님도 어려운 계명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은 의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이런 질문을 통해서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를 더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이 하나님께 더 다가가게 합니다.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찾게 만들죠.


이 큰 계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부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부부는 사랑의 결정체이며 언약의 관계를 말합니다.

부부관계는 인간의 사랑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도 깊이 개입, 아니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19:6, 새번역) ]

그러니깐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딱 하나만 지키면 됩니다.

배우자보다 좋아하는 것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찾지 말아야 합니다.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상도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내/남편보다 더 좋은 배우자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면 어떻게 될까요?

그 문으로 누가 들어올까요?

아내보다 더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요?

남편보다 더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요?

아내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면, 남편보다 일을 더 사랑한다면 …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배우자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한 여자만을

오직 한 남자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쯤 해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 그 계명의 실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상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큰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명령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기준 그리고 실체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완벽한 부부는 서로의 사랑이 5:5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피조물(어찌 보면 반려견 정도)로 보시지 않고 자신과 똑같은 존재로 대우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그런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딸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기대도 안하고, 그렇게 부모를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부부관계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요?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이니,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마9:14-15, 새번역)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있다가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있다. (3:29, 새번역)


결론 / 반복이지만 …

가장 큰 계명의 실체는 인간이 지켜야 하는 그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키는 계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부부가 서로 지킴으로 사랑을 유지하는 것처럼 말이죠.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생명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인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니깐 생명이신 하나님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피조물을 자신처럼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는 계명이지만, 

그 누구에게는 특권이며 자격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다움에서 예수다움으로(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