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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Nov 10. 2019

자기다움에서 예수다움으로(8)

나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나는 런던에 가면 본드 스트리트에는  소더비Sotheby’s 경매장에 항상 방문을 한다. 경매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니고 소더비 2층에 전시되어 있는 경매 물건을 보기 위함이다. 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1층 로비에서 무료 팸플릿을 챙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날따라 2층에 엄청난 크기의 그림이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피카소의 그림이었다. 나는 그림 앞으로 가서 ‘가격’부터 확인해보았다. 사려는 것은 아니고 내가 보고 있는 그림이 피카소 진품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가격이 파운드였기에 나는 핸드폰 계산기를 꺼내서 환율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어떤 금발 여자가 나에게 와서 ‘무엇을 도와줄까요?’라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녀에게 나의 수준을 드러내는 부끄럽고 창피한 질문을 했다.


 “이 피카소 그림은 진품인가요?” (나는 왜 이런 멍청한 질문을 했을까?)

 “물론 진품입니다.” 금발 여자는 아무 표정 없이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상한 질문을 계속했다.

 “혹시 소더비에서 일하나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그렇다고 말했다. 

 “저는 한국에서 브랜드 잡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국의 로열 워런티(왕실 납품) 브랜드를 연구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다.”나는 그녀에게 내가 발행했던 잡지를 보여주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경매 제품이 진품과 너무나 똑같은 것이 있다면, 도저히 과학적으로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같다면 어떻게 결정을 하나요?” 

그녀는 나의 질문을 받고 이제는 웃으면서 지갑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어 나에게 주었다. 그녀는 소더비의 부대표였다. 

 “너무나도 똑같은 위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저희는 진품을 확인하기 위해서 작품을 소유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합니다. 주인을 확인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진품인지 가품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리지널의 확인은 족보였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족보가 그렇게 나와있던 것인가?)




 인간은 소더비 경매와 비슷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주님의 피값으로 경매와 같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되어있다. 그 심판대 앞에서 인간은 주님의 것인가 아니면 사탄의 것인가가 확인 및 결정된다. 그 누구도 보류, 미확인 그리고 검토요망은 없다. 

 아마도 많은 크리스천이 복음을 처음 접했을 때 이런 최후의 심판을 염두한 전도를 받았을 것이다. 전도 콘셉트는 한마디로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다. 그리고 예수 천당을 풀어서 이렇게 말했다. ‘믿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입으로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고 제 기도를 따라 하세요. 이렇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이런 천당 논리로 주님을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 천당’이 아니라 ‘예수(이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천당’인 것 같다. 시쳇말로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과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예수님이 인정하는 것은 시쳇말로 며느리와 민며느리 차이인 것 같다. 이 차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24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마 7:21-24, 새번역)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은 나의 순전한 믿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믿고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 신앙을 군대의 암구호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날에 천국 문 앞에서 천사가 [예수]라고 물으면 우리는 [천당]이라고 말하면 하늘나라로 무사(무료) 통과 입성하는 그런 프리패스 신앙을 예수천당 믿음으로 오해하고 있다,‘예수 천당, 불신 지옥’ 공식은 천국의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방향일 뿐이고 이것을 한번 믿어 보는 것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 예수 천당과 불신지옥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국에 들어가는 신앙인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 신앙을 구분하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소더비 기준으로 확인해보면 된다. 모의고사라는 말과 맞지는 않지만 일종에 자가점검이다. 

 먼저 내가 어제 행했던 것을 적어보자. 


 -직장에서 브랜드 론칭 마케팅 회의 

 -원고 작상

 -아이들과 가정예배 

 -남품업체와 미팅 

 -소비자 간담회 참석

 -고등학교 학부모 모임에서 미팅 등등 


이렇게 어제 했던 일을 적어 본 후에 주님의 말씀을 적용한 일을 적는다. 

직장에서 팀원들과 회의를 하기 전에 나는 어떤 말씀에 의지해서 회의에 참석했는가? 회의 중에 내 의견을 반대한 팀원들에 대해서 나는 어떤 말씀을 참고하여 피드백을 했는가? 내가 결정한 A 안은 주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 신앙인이 어제 모든 일을 이렇게 말씀으로 점검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고,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 위해서 하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오늘 행할 일들을 적어 보고 말씀을 적용해보자. 이것 또한 어려운 것은 나의 일에 적용할 말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읽지 않아서 예수님에게 들은 말씀이 없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은 나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진짜 믿는다면 입으로 시인한 것을 몸으로 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에 말씀을 적용했고, 사람들에게는 들에 핀 백합화를 가리키면서 하나님을 설명을 했다.  바울도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 적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4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엡 4:1-4, 새번역)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바로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삶이다. 그런 삶은 신비주의나 은사주의 삶이 아니다. 겸손하고 오래 참고 용납하는 삶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삶을 소금과 빛의 삶이라고 했고,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겨주면서 ‘서로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나의 어제 일과 오늘 일에 대해 나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했는가? 


  바울 사도는 우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라고 당부했다.


4 그분은 약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합니다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분과 함께 살아나서, 여러분을 대할 것입니다. 5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6 그러나 나는 우리가 실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후 13:4-6, 새번역)


‘스스로 시험해보고’의 헬라어는 페이라제테[되돌아 보다, 성찰하다]이다. 시험과 검증을 통해서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께서 자신의 일을 한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그 과정이 바로 자기다움에서 예수 다움으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이 구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에서 여러 성경은 이렇게 해석했다. 개역개정에서는 버림받은 자, 쉬운 성경에서는 불합격한 사람들, 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영어성경에서는 You have failed the test of genuine faith라고 말한다. 


나는 믿음을 갖은 지 34년 만에 ‘스스로 시험하고 스스로 검증’ 방법으로 신앙글을 지금 브런치에 쓰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반성문反省文’이다. 반짝인다고 다이아몬드가 아닌 것처럼, 내가 큐티해서 마음이 움찔했다고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나의 반성은 성경을 읽다가 반짝거린다고 모았던 말씀들을 확인하는 것이다. 큐티를 많이 했다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 말씀을 내가 지키고 있는가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것이 진짜 반성(나를 돌이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반성은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했는가가 아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정말 계시는가? 나는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정말로 함께 살았는가이다. 나의 행위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이다. 나의 반성은 ‘나는 나의 모든 일에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기도했는가?’이다.   


11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 4:11-13, 새번역)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이 구절은 시험과 게임 앞에서 신앙인들이 혼자서 많이 중얼거리는 말씀이기도 하다. 단지 자기 승리를 위한 말씀암송은 주님이 능력 주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일종에 자시 확신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의 위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바울은 부유하고 넉넉한 삶처럼 비천하고, 굶주리고 궁핍한 삶도 거뜬히 살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고 목숨이 위태롭게 일하고 헐벗고 굶주려도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주님의 능력은 승리와 합격이 아니라 고난과 고통이다. 바울의 ‘스스로 만족’이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소더비의 진품 가품 판결법처럼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지금 누구안에 있는가이다. 


침팬지는 사람의 유전자와 99.4%(연구 기준에 따라서 숫자는 달라진다)가 같다고 한다. 사람과 99.4% 닮은 침팬지가 사람처럼 흉내 내고 사람처럼 살다가 죽었다면, 사람으로 죽은 것일까? 아니면 침팬지로 죽은 것일까? 나도 기독교인으로 살다가 죽고 싶다. 그런데 나는 기독교인처럼 흉내 내다가 죽게 될까? 아니면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바울 사도의 자기 점검에 따라서 나는 기독교인지 아니면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침팬지인지 스스로 구분을 하려고 하지만 어렵다. 내가 기독교인 것 같은 이유와 내가 기독교인이 아닌 것 같은 이유가 상황에 따라서 이슈에 따라서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이다. 

  내가 침팬지 기독교인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여러 방법 중에 나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신이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까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서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사귐이 있다면 기독교인 확률이 높다. 나의 예수다움은 혼자 있을 때 누구와 함께하고 무엇을 하느냐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 준다.  그리고 나를 소유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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