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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Jul 30. 2022

휴먼브랜드 회고록(3)/웍샵

자기다움(2) -활용 편

다쳐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상처를 보고 웃는다 - 세익스피어



습윤濕潤밴드


 장마가 내일부터 시작한다고 해서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2018년 여름에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해서 나도 아들과 같이 타려고 샀다. 지금은 동네 공중목욕탕이 거의 사라졌지만, 아들과 함께 공중목욕탕에 가는 것이 아버지들의 로망인 적도 있었다. 아들과 함께 한강 자전거 라이딩도 이런 것 중에 하나다. 하지만 아들은 자전거를 몇 번 타다가 한강을 한번 같이 가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2022년까지 2만 5천 킬로미터를 탔다. 서울에서 뉴욕을 왕복한 거리다. 나의 목표는 죽을 때까지 지구와 달의 거리인 384,400km를 완주로 정했다.


 나는 라이딩을 즐기는 자덕(자전거 덕후)이 아니라 숙면을 취하기 위해 수면제 대신에 결정한 처방이었다. 아침에 자전거를 30킬로 타고나면 그날 저녁은 깨지 않고 자는 편이다. 수면제 자낙스 중독이 무서워서 자전거를 탔는데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는 강박증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잠자기 위해서 자전거 페달을 돌렸다.


 그날은 장마 직전에 불어오는 앞바람 때문에 자전거 타기가 힘들었다. 나는 20킬로와 30킬로에 쉬면서 물을 마시는데 속도계를 보니 25킬로미터를 지나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자전거 바퀴가 흔들려서 중심 잡는 데만 신경을 썼다. 라이딩이 힘들어서 30킬로미터 완주를 포기하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쉬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가기 위해서 자전거 다운 튜브에 걸려있는 물병을 빼서 마시려고 했다.


속도를 줄이고 나는 오른손으로 물통을 눌러 물을 짜내려고 할 때 자전거 앞에 도로 방지턱을 발견했다. 나는 오른손으로는 물통을 잡고 왼손으로는 로드 자전거 핸들 윗부분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브레이크를 잡을 수가 없었다. 턱을 피하려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앞바퀴가 이미 턱을 넘어서면서 심하게 흔들렸다. 핸들에 충격이 오면서 왼쪽 손이 흔들렸다. 나는 자전거 페달과 일체가 된 클릿 슈즈를 신었기에 자전거와 함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예전에 자전거 낙차로 인해서 두 달 동안 병원에 다녔던 적이 있었다. 1~2초도 안 되는 순간이지만 나는 두 개의 선택 안으로 고민했다.


자전거 핸들을 왼쪽으로 몰아서 몸을 사이드 브레이크처럼 활용해 벽을 쓸면서 자전거를 멈출 것인가? 아니면 오른쪽으로 그대로 넘어질 것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들고 있는 물병을 버리고 오른손으로 브레이크를 잡으면 무사했지만 아마도 그 순간까지 나는 잘 멈출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짧은 순간에 또 한 번 나의 고집과 미련함을 경험했다.


몸이 벽에 붙으면서 그 마찰력으로 멈췄다. 큰 충격은 없었지만, 종아리가 목제 벽면에 쓸리면서 긁혔다. 넘어지지 않고 몸 브레이크로 멈췄다. 다리를 살펴보니 왼쪽 종아리 측면이 빨갛게 손바닥만큼 쓸렸다.


손바닥 크기 정도였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껍질 벗긴 봉숭아처럼 분홍색 피부가 되었다. 그렇게 심한 상처가 아닌 것 같아서 먹던 물통의 물을 다리에 뿌려서 이물질을 떼어내려고 했다. 물을 붓는 순간에 내장에서 비명이 터져 올라왔다. 나는 욕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욕을 하는 내가 스스로 놀라서 잠시 나에게 당황했다. 다리가 얼얼하게 화끈거렸고 감정은 민망했다.


“왜 이렇게 따가워?”. 정확히 말하면 따가운 것은 아니고 예전에 인천 해수욕장에서 해파리 촉수에 쏘였던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고통의 정도로 본다면 꽤 다친 것 같아서 다시 상처 부위를 자세히 보았지만, 피가 심하게 나지는 않았다. 피부는 봉숭아에서 귤 껍질 같은 핑크 오렌지색으로 변해갔다. 나무껍질 같은 것이 붙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물을 다시 뿌렸다. 내 위장에서 다시 거친 소리가 터졌다.


나는 외출한 아내에게 전화했다.

“집에 후시딘 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내는 상황을 눈치챘다.

“다쳤구나? 얼마나 다쳤어?”

후시딘은 찾아봐야 하고 소독약은 있다고 했다. 토요일이어서 영업하는 약국을 찾는 것이 좀 난감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니 종아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부터 창문에 서리가 맺히는 것처럼 내 종아리에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인제야 종아리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시작했다.

집에 도착해서 소독약과 다 쓴 치약 같은 후시딘을 찾았다.

늦잠을 자던 아들도 아내가 전화해서 아빠에게 약을 찾아주라 전화해서 일어났다.

몇 분을 뒤져서 겨우 서랍에 처박혀 있는 엠와이 과산화수소수도 발견했다.

그것을 상처 부위에 부으니 카페라테 같은 거품이 올라왔다. 물로 뿌렸을 때보다 2배는 더 뜨겁게 아팠다.

그때 아내가 집에 왔다. 아내는 나의 상처를 보고 끔찍하다고 하면서 병원에 가자고 했다 .

“이제 소독약을 닦았으니 후시딘 바르면 돼. 계속 일어나는 거품을 닦고 다시 뿌리려고 했다.

“이거 상처가 심한데 빨리 병원에 가요.” 아내는 다리에서 일어나는 하수구 거품 같은 것을 보면서 재촉했다.

"오늘은 토요일인데 문을 연 병원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아내 말을 무시하고 거품을 닦아냈다.

그때 뒤에서 변성기가 된 아들이 묵직한 톤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엄마 말 들어요” "..."아니, 이 말은 내가 항상 딸과 아들을 혼낼 때 하는 말인데. 나는 또 한 번 방지턱을 넘어서는 기분이었다.

요즘 사춘기로 나와 엄마 말을 개뿔로 듣는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다.

황당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고 어이가 없었다. 나에게 또 한 번 선택해야만 하는 시간이다.

그냥 아들과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후시딘 바르고 끝낼 것인가? 아니면 엄마 말을 들어서 아들에게 모범(?)이 될 것인가?



나는 [엄마 말을 들어]서 아들에게 엄마 말은 듣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룰을 만들어야 했다. 가문의 전통을 세울 때가 왔다. 자식은 삶으로 가르친 것만을 배운다고 하는데... 바로 지금이다.

이 상황에서 엄마(아내)말을 듣지 않는다면 아들도 엄마 말을 듣지 않겠지.

2초이지만 나는 엄마 말, 아내의 말을 듣기로 했다.

정말 2초 동안 수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

“그래 병원 가자.” 나는 일어섰다.

병원에 도착했다. 의사는 상처를 보고 이 정도 찰과상이면 화상 상처와 같다고 말했다. 혹시 모르니 파상풍 주사도 맞아야 한다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의사는 상처를 소독약을 바르고 피부에 깊숙이 박힌 모래 같은 먼지를 닦아냈다. 왜 의사들은 이렇게 무자비할까? 그렇게 치료가 끝내고 병원에서 습윤밴드라는 것을 붙였다. 대일밴드가 아니라 습윤밴드라는 것을 처음 들었다. 의사는 습윤밴드를 붙이고 3-4일이 지나서 진물이 올라와서 밴드가 볼록할 때까지 교체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처음으로 습윤 밴드를 종아리에 붙이고 나왔다.


습윤밴드의 습윤은 우리나라 제주도의 대표 기후를 설명하는 온난 습윤 기후()와 같은 단어다. 습윤은 한자 단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습기가 많다’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습윤밴드가 습기가 축축한 밴드는 아니다.


의학용어는 이렇게 정의한다. [습윤밴드는 피부가 상처를 입은 후 발생하는 삼출물(진물)을 흡수하고 출혈 또는 체액 손실 및 오염방지, 습윤 환경 조성이 필요할 때 사용한다. 대부분 ‘하이드로콜로이드’ 재질로 만들어지는데, 해당 재질은 상처에 딱지가 생기지 않도록 습윤 환경을 유지시켜 줌으로써 상처 치유를 돕고 먼지 등 외부 오염 물질로부터 상처를 보호한다.]


습윤밴드는 붙이고 시간이 지나면 진물이 나면서 밴드가 진물로 부풀어 오른다. 습윤밴드를 처음 쓰는 나에게는 희한한 장면이었다. 그렇게 몇 번 드레싱을 해주면서 나의 상처는 점점 새 살이 돋아 올랐다. 며칠 동안 상처부위가 간질 거려서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살이 올라와서 간지러운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이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다. 강아지들이 이빨이 생기면 간지러워서 아무거나 물어뜯는다고 하는데 정말 간지러운 그런 것일까?


3주일 동안 습윤밴드를 5회 정도 교체하였다. 신기하게도 딱지도 생기지 않고 새 살이 만들어졌다. SF영화에서 나오는 치료 캡슐 같은 드라마틱하고 경이로운 치유였다. 심지어 상처 위에 생긴 새 피부는 주변 피부보다 더 매끄러웠다.

 습윤밴드의 치유 경험으로 나는 회고록에 대해 가장 적절한 비유와 상징을 발견했다. 회고록은 습윤 밴드와 같다. 회고록은 어렸을 때 상처 난 기억을 긁어(기억해서) 부스럼(괴로움)을 내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는 습윤 밴드와 같았다.   




습윤濕潤 글쓰기

 습윤밴드가 진물로 부풀어 올라 첫 번째 교체할 때가 왔다. 상처는 왼쪽 종아리 왼편 아래 지점이어서 혼자서 드레싱 하기가 어려웠다. 병원에 가지 않고 혼자 앉아서 다리를 비틀어 미세한 신음을 내면서 떼려고 할 때 왼쪽 무릎에 난 2개의 상처가 보였다.

두 개의 상처 중에 엄지손톱 크기에 불주사처럼 생긴 상처는 1975년, 내가 7살 때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난 상처다. 내가 이 상처가 기억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 상처가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3발 자전거를 빌려 탄 것 같다. 집에서 도로까지 2도 경사가 있는데 나는 브레이크가 없는 이 자전거를 타고 내려왔고 속도를 이기지 못해서 넘어졌다. 이제부터 기억은 생생하다. 오른쪽 무릎에 살이 까져서 덜렁거렸다. 나는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고 계모는 그것을 보고 수돗물로 씻기고 빨간약을 발라 주었다. 치료를 받은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다. 병원도 가지 않았고 그냥 소독약만 발라주었다. 그 상처는 염증이 생겼고, 딱지가 올라오고 나는 가려워서 긁어서 피가 나고 감염이 되었다. 꽤 오랫동안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부모님이 7살에 이혼하고 내가 어머니 없이 처음 상처 난 곳은 내가 태어날 때 잘린 배꼽 흉터처럼 내 무릎에 배꼽만한 크기로 지금도 남아있다. 배꼽은 태어나기 위해서 어머니와 잘려 나간 상처라고 한다면 무릎은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어머니가 이제는 내게 없다는 낙인이 되었다.


 오른쪽 다리에는 상처가 아니라 특이한 ‘점’이 있다. 이 점도 친어머니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점에 관한 장면은 어머니와 헤어지는 서울역은 아니었다. 7살보다 더 어린 시절인 것 같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울고 있었고 어머니는 나에게 오랫동안 멀리 갔다가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손바닥을 내 키보다 위로 올리면서 이만큼 크면 오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에게 내 오른발등에 있는 큰 점을 보여주면서 이 점을 보고 나를 확인하라고 했다. 마치 펭귄 새끼가 물고기 사냥을 하러 가는 엄마 펭귄에게 자기 목소리를 알려주는 것처럼 나도 어미 펭귄에게 나를 확인할 수 있는 나만의 점을 알려 주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내 발을 만져 주었다. 기억은 거기까지다.


 어머니와 7살에 헤어지고 다시 만난 것은 11년이 지난 어느 여름이었다. 고2 때 나는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성적은 계속 떨어졌다. 아버지는 나를 불렀고 그 이유에 관해서 물었다. 나는 친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황당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 단 한 번도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에 놀란 아버지는

몇 주 후에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동대문에 있는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제왕절개를 통해서 낳았다고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배를 보여주면서 한 뼘 정도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배를 찢고 나왔고 그녀에게도 내 무릎의 상처와 같은 이별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전쟁고아였고 양녀로 살다가 아버지와 만나 결혼했다. 그녀의 삶은 드라마에서 보여줄 수 있는 상상보다 더 가혹한 삶을 살았다.


 친어머니는 다시 만나고 30년이 지난 내 생일에 뜬금없이 만나지 말자고 전화로 통보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얼굴이 점점 아버지를 닮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거울을 보면서 아버지와 얼굴이 닮아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닮아가지 않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살이 찌거나 말라야만 했다. 어머니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을 때 놀랍게도 아프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어머니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기분은 더러웠다. 마치 자궁 안에 있는 나를 제거하기 위해서 의사의 집게가 들어와서 나의 팔을 잡아서 당기는 그런 기분이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두려웠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해서 결국 어머니에게 강제 유산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도 아버지를 싫어했기에 어머니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냥 닮아가는 내 얼굴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한동안 거울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이별 통보를 받고 2년이 지난 후에 어머니는 전화해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만나고 식사했다. 미안하다는 몇 마디가 몇 번 하셨고 나는 애써 괜찮다고 했다. 다행히 이때는 내가 기억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영혼의 바다로 흘려보냈다.

 관계의 상처는 이렇게 낫고 곪고 딱지가 생기면 또 긁고 … 언제까지 이럴까?

사람들이 당황스러워할 만 이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하는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은 회고록을 쓰고 난 이후부터이다. 분명 나의 이야기이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그들과 이별하고 화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습윤밴드의 치료과정과 너무나 닮았다.




습윤밴드처럼 글쓰기

과거의 아픈 기억이 있다면 차분히 앉아서 그 기억을 팩트 중심으로 써본다. 내가 화가 난 이유, 욕이 나오는 이유, 열받은 이유 등. 필요하다면 욕을 써도 좋다. 일단 끝까지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긁어 부스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중도에 포기하면 안 된다. 이 과정은 상처 소독을 위해서 빨간약을 바르는 것이다(라고 믿어야 한다). 따끔거리고 화끈거리며 모든 피부에 노출된 신경이 고통을 뇌로 전달하지만 그래도 습윤 밴드를 쓰기 전에 소독은 해야만 한다. 의사들이 환부에 묻어있는 흙을 긁어내거나 닦아 낼 때 환자의 비명에도 동요하지 않고 치료하는 것처럼 나도 나의 상처를 글로 벅벅 긁어내야 한다. 더 이상 쓸 욕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쓴다. 이상하게 그런 과정이 지나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울고 나면 가슴이 시원한 것처럼 내 배속 어느 곳에 뭉쳐있던 더러운 감정이 오물처럼 노트에 흐린 것을 볼 수 있다. 쏟아지는 눈물과 솟구치는 욕은 상처에 새살이 나기 위한 진물과 고름이라고 생각하면 희한하게 안정이 된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습윤밴드를 붙이는 것이다.


쓴 글은 읽지 않고 며칠 지나서 다시 읽는다.

놀랍게도 (꼭 한번 해보기를) 그러면 기억하지 못했던 그 기억 주변에서 진물이 생기고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만 보는 회고록이라면 나의 첫 번째 회고록처럼 욕으로 시작해서 저주로 끝날 수도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몇 주가 지나 회고록을 읽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 보이고 상황도 이해된다. 이렇게 마음이 바뀐 것에 대해서 처음에는 포기, 자위, 인정 그리고 정신 승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에 집착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나의 더러웠던 시간 속에서 내 기억이 피딱지가 되고 그 안에서 새 살, 그러니깐 새로운 생각이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휴먼 브랜드를 하면서 이렇게 나의 통점을 건드려야 할까? 나의 경우에는 트라우마(상처)는 지금의 카리스마(재능)가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대부분은 바로 나의 트라우마를 덮고 나온 새살로 인해서 단단해진 카리스마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생존하기 위해서 갖게 된 본능이다. 조개 속에 진주와 비슷한 것 같다.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다. 습지에서 돌덩이라는 들어 올리면 숨어 있던 벌레들이 갑작스러운 빛에 놀라서 도망간다. 과거의 기억도 회고록을 쓰기 위해서 노트를 열고 연필을 들어 올리면 도망갔다. 자세히 보면 그 기억에 숨은 벌레 같은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회고록을 쓰면 선택적 망각으로 인해 잊었던 과거의 상처 같은 기억들 때문에 특정 과거 기간에는 진입도 하지 못했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인생의 부분이기에 코를 찌르는 악취로 가득 찬 쓰레기 소각장에서 미래의 내가 될 수 있는 단서를 찾아야 한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만들어진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주변에서 가끔 본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트라우마가 최악의 경우로 변했다. 시간(마감) 강박 관념이다. 40세까지 나에게 시간 강박 관념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예전부터 마감을  지키고, 사전에 모든 일을 끝내고,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가지 불편한 것이 있다면 오전 8 정도에 약속을 잡으면 새벽 3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시간에 대해서 유별나게 민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것을 통제할  있었다고 착각했다.


이런 사람이 마감을 지켜야 하는 편집장을 한다는 것은 기름을 들고 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결국 나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이빨이 3개나 빠졌다. 이런 시간 강박증은 브랜드 주제의 완성도를 올릴 때는 남들에게 없는 원자력의 핵연료봉처럼 사용됐다. 컨설팅을 할 때도 놀라운 에너지를 보여주었다. 문제는 진짜 핵연료봉처럼 쓰고 나서 골치 아픈 핵폐기물이 생긴다는 것이다. 잡지 마감에서 사용되고 강화된 강박증은 나의 일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강박증은 왜 생긴 것일까? 나의 유년기로 내려가면 발견할 수 있다. 나에게는 형제가 4명이 있다. 그러나 모두 어머니가 다르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나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강박증은 이런 환경의 부산물이다. 어렸을 때 나는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할 일이 있었고 항상 그것을 해야만 했다. 잠을 자기 위해서 반드시 자전거를 30킬로미터를 타야 하는 강박증도 여기에서 나왔다.


나는 회고록을 쓰면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진 나를 만났다.

 분노, 원망, 저주, 비난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회고록은 습윤밴드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새살이 돋게 해 주었다.


 회고록을 쓰기까지 이런 상처는 내 무릎 상처처럼 아물지 않고 계속 덧나고 딱지 앉고 다시 띄고 …. 내가 이런 상처를 이해하고, 아니 덮어버린 것은 회고록을 쓰고 나면서부터였다.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서 나는 과거로 돌아가야만 했다. 내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괴물을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갑작스러운 사과, 용서를 구한다.

그러니깐 2007년까지 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 지금 돌이키면 그때는 괴물에 가까운 존재였다. 지금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나는 회고록을 쓰면서 최악의 상황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끔찍이 싫어했던 나의 부모들의 그것들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바다에 가라앉은 도시와 같다. 처음 회고록을 쓰면서 상처를 기억하는 것은 마치 프리 다이빙으로 가라앉은 도시로 들어가는 두려움이었다. 숨을 참고 과거의 어두운 시간으로 내려갔다. 기억과 사건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고 싶지만, 숨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불편한 사람들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라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더 깊은 기억으로 내려가기가 어렵게 된다. 그렇게 숨을 참고 끝까지 내려가면 망각의 바닥에 이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기억이 없다) 그냥 깜깜하다. 뭐라도 하나 얻으려고 그때 생각을 하기 위해서 손으로 기억의 바닥을 더듬으면서 사건과 이유를 생각하려고 한다. 고통의 ‘긍정적 이유’를 찾는 것만큼 초라하고 궁색한 작업이 없다. 삼류 드라마 대본을 만드는 헛수고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내 인생이었기에 끝까지 바닥을 손으로 긁어보면서(노트에 낙서를 하면서) 뭔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결국에 역한 감정이 올라와 숨이 차서 나는 다시 현실 위로 올라오고 싶은 심정으로 과거에서 뛰쳐나오고 싶어 진다. 이렇게 처음에는 과거와 직면하여 숨을 참지 못하고 노트를 그냥 덮어 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내 인생의 일부이기에 드레싱을 해야만 했다. 나를 위로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상처를 열고 소독하고 다시 습윤밴드를 덮어야만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글로 쓰면 어느 정도 객관화된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과거 상처에서 고름과 피가 아니라 진물이 나온다. 내 몸이 스스로 나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다고 닦아내는 일이 회고록을 쓰는 것이다.


  휴먼브랜드의 회고록은 리서치다. 소비자 불만 조사라고 생각하면 편해진다. 과거로 돌아가 서 나를 괴롭혔던 또라이와 양아치들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제는 나는 인간이 아니라 휴먼 브랜드로서 나의 과거에서 나의 키워드를 확인한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를 회고해서 쓰는 것은 고통스럽다.


습윤밴드의 단점이 있다면 상처 부위가 아니라 밴드가 붙어 있던 피부에서 트러블이 생기는 것이다. 오랫동안 붙어 있다 보니 생기는 상처다. 습윤밴드 같은 회고록을 쓰면서 다른 감정이 아플 수 있다. 하지만 글로 쓰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자기기만인지 뇌과학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래야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출판을 위한 회고록이 아니라 나만 보는 회고록은 쓰는 것 자체가 어렵다. 소각시킬 회고록을 쓰는 이유는 낯선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과거의 나를 이해하는 것은 지금의 나를 붙잡고 있는 예전에 나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휴먼 브랜드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나의 불완전한 아동 성장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나에게 [유산 포기각서]를 쓰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그렇게 그가 나에게 부여해주었던 주민등록번호와 성씨 [조]를 본떠서 만든 서명을 해서 보내드렸다. 부모에게 계속 부정당하면서 이렇게 잘 견디고 있는 나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것은 자기다움이었다. 이 정도라면 자존감이 무너지고 해체되어서 자기다움이 없어야 할 것 같지만 회고록은 나를 더 나답게 만들었다.


 회고록을 쓰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그렇게 회고록을 한번 쓰면 기억하지 못하는 하루가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를 알게 된다. 나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썼다. 그래서 2000년도 이후에 회고록 작성에는 기억을 더듬기 위해서 망각의 바다 밑을 손으로 더듬거리면서 기억을 찾지 않는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이 얼마나  변화를 가져오는가에 대해서 놓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일기라는 하루의 회고록을 쓰면서 하루를 자기답게 살아가려고 노력 중이다.


어떤 기억은 이렇게 몸으로 남는다





습윤 밴드같은 회고록이 궁금하다면 아래 두 권의 책을 추천한다.

이들도 어린 시절의 어려웠던 것을 회고록을 쓰면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필립 얀시






타라 웨스트오버








https://brunch.co.kr/magazine/humanbrand




7살때 자전거 낙차 했던 그 곳 ... 이문동





T.M.I 습윤밴드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아들에게 자전거 가르쳐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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