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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Aug 23. 2022

휴먼브랜드 회고록(10)/웍샵

자기다움(2) -활용 편

새 이름을 받다


휴먼브랜드의 회고록의 결론(결과물)은 아래 그림이다. 















이 연재가 끝날 무렵... 어떻게 새 이름을 얻는가에 관해서 이 그림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듣고 싶다면.. 아래 동영상을 보세요. 부분적이지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EMZsSbReHM





이 바보야! 모든 것에 때가 있어. 


이랜드 그룹 마케팅팀에서 비영리단체 낮은 울타리의 문화사역 본부장으로 이직하려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그런데 그때를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그때는 IMF 시기였기에 사회경제는 혼란스러웠고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 인원 30명이 되는 작은 비영리단체로 이직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 당시에 나는 결혼 2년 차였다. 반지하 11평에서 살고 있는 가난하고 초라한 가정으로 신혼을 보내고 있었다.  장마가 오면 근처 개천이 범람하여 우리 집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가 했다. 


 우리 식구 중에 유기견 몽찌라는 강아지였다. 회사 근처에 발견해서 주변에 포스터도 붙이고 돌아다니면서 주인을 찾아다녔다. 3일 동안 회사 창고에서 몰래 키우다가 결국에 집으로 데리고 왔다. 어느 날 몽찌가 계속 기침 같은 것을 해서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수의사가 이렇게 물었다. 


 “혹시 반지하에서 사세요?” 


지금 생각해보아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질문이었다. 수의사는 몽찌가 폐렴에 걸렸다고 했다. 그렇게 아내와 나는 젊은 날에 부부로서 힘겹게 살았기에 작은 비영리 단체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만약에 내 자식이 나와 똑같은 상황에서 조언을 구했다면 나는 결코 가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비영리 조직이 앞으로 전개될 고난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빈곤이 찾아온 이 시점에서 나는 퇴사를 망설이는 나에게 질문을 했다.


“진짜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퇴사를 하면서 질문이 바뀌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퇴사를 위해서 질문을 바꾸었다. 내가 이랜드 광고기획자가 되기 위해서 나를 끌고 왔던 질문은 [네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이다.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에 차이는 미묘하다. 이 질문이 처음 듣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끝까지 따라가면 ‘되고 싶은 것과 갖고 싶은 것’으로 바뀐다. 원하는 것은 목적에 가깝고, 하고 싶은 것은 방법에 가까웠다. 어디까지나 이런 의미와 이해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과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작은 혈액형별 교육관리였다. 왠지 ‘교육’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광고 기획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문화와 행사 기획에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광고였다. 그렇게 나는 광고를 하고 싶어서 이랜드에 입사했다. 수많은 책을 읽고 브랜드 광고를 기획하면서 살았다. 


그 당시에 누구가 열심히 살았기에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회사 경영자보다 일찍 출근을 했고 가장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면서 그것을 나의 존재감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하나의 시안을 준비할 때 나는 3개의 시안을 준비했고, 쉬는 날에도 나의 일에 맞는 훈련과 지식을 쌓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일하다가 광고 기획가로 죽고 싶은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죽으면 나답게 인생을 산 것일까? 31살의 나이에게는 조금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진지했던 이유는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서 나는 항상 나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의 다른 질문은 ‘나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와 같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죽고 싶은가? 일찍이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까지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다. 손목에는 여전히 자살흔이 여러 개 남아 있다. 지금도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사람을 만나면 나의 손목에 뚜렷이 남아있는 자살흔을 보여준다. 그러면 대부분 믿기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보고 천천히 가슴에 품었던 아픈 이야기를 나누어 준다. 


 자살에 대한 의미는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똑같다’라는 논리였다. 죽으면 똑같이 먼지가 되는데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때는 이런 질문에 대답이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이렇게 죽고 싶다’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렇게 죽기 위해서 살고 있다. 나의 죽음이 나의 목적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염세적인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다. 오늘 하루 지금 여기의 삶을 누리면서 나는 내가 죽고 싶은 사람처럼 지금 살고 있다. 


나는 광고기획자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일이 즐거웠지만 그리고 남들보다 성과가 좋았지만 그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내가 죽고 싶은 것은 모라비아 청교도처럼 죽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광고 기획이 아니라 비영리 경영이었다. 나는 퇴사를 하면서 이 질문을 끝까지 가지고 갔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지금까지도 기억하려고 노력했지만 혈액형 교육처럼, 왜 내가 나에 관한 미래 소설을 쓰고 싶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지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그냥 소설을 쓰고 있는 모습만 기억이 난다. 


내가 쓴 자전적 미래 소설이 [새벽 나라에 사는 거인]이다. 31살 회고할 것이 전혀 없었던 나는 미래를 회고한다는 개념으로 쓴 소설이다. 나는 미래를 경험하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고, 이런 고민이 있고, 이렇게 갈망한다는 것을 알고 싶었다. 그러니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그 주인공에게 계속 문제와 시련을 던져 보면서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론이 없는 집필이지만 나의 일상생활에서 모티브를 찾아서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낮은 울타리에 입사하면서 나는 자전적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퇴사를 한 이후에 첫 번째 나를 찾아온 사람은 주간 업계지인 [패션인사이트]의 황상윤 편집장과 정인기 부장이었다. 이들과 인연이 된 것은 이랜드 그룹에 있을 때 후아유라는 브랜드 론칭을 하면서 방대한 보도 자료를 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패션 브랜드 기획자와 달리 나는 광고기획에서 배운 잔기술을 통해서 업계 전문지답게 보도 안을 주었다. 그것에 대해서 황상윤 편집장이 흥미롭게 본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혜화동에 있는 한정식집이었다. 이때의 만남은 너무나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2년이 지난 일이 마치 어제 일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큰 기대와 의미를 두고

 만난 미팅은 아니었다. 시작은 ‘밥 한번 같이 먹죠’라고 시작되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밥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상에 반찬을 수북이 담고 한 상을 만들어서 세팅해주는 곳이다. 우리가 앉은 곳은 아무것도 없는 방바닥이었다. 머슴 복장을 한 두 명의 사람이 밥상을 들고 우리 주변에 왔다. 그때까지도 가보지 않았지만 민속촌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황상윤 대표는 나에게 원고 청탁을 요청했다. 그런데 조건이 까다로웠다. 조태현이라는 이름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랜드에서 퇴사했을 때 나의 직책은 대리였다. 전직 대리가 업계지에 글을 쓸 때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우려했다. 그들이 제안한 것은 익명으로 나가고 르포 형식으로 패션업계의 잘못된 비리를 고발하는 기사를 쓰자고 했다. 


제안받은 투고의 제목은 [쟈칼의 이빨]이었다. 이 제목은 아마도 밥 먹다가 농담으로 나왔던 제목이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권민]이라는 이름으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권]씨 성은 나의 친어머니의 성이었고, 민은 백성 민의 뜻이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객원기자 권민으로 8번 연재를 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패션 인싸이트 객원기자 권민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이랜드 퇴사와 낮은 울타리 입사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지금도 그 장면과 그 음식들이 입안에서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진짜로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깐 그날 받았던 밥상은 나의 생일 밥상이다. ‘밥 한번 같이 먹죠.’가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주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8번 연재가 100번 연재로 끝이 났다. 2년 넘게 나는 권민이라는 이름으로 패션인사이트의 패션 마케팅 객원 에디터로 연재를 했다. 이렇게 연재를 하면서 나의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었다. 조태현에서 권민으로 그리고 광고에서 브랜드로 나의 유전자가 바뀌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쓰고 있었던 소설의 픽션에서 팩트로 바뀌어갔다.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권민으로 바꾸었다. 나는 낮은 울타리에서는 조태현으로 살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권민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낮은 울타리는 나에게는 직장이 아니라 자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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