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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Aug 25. 2022

휴먼브랜드 회고록(12)/웍샵

자기다움(2) -활용 편

빛나는 어둠 


낮은 울타리에서 조태현으로 근무하면서 권민으로 패션인사이트에 글을 썼다.


[헤리 포터]를 쓴  J. K. 롤링은 본명은 이름은 '조앤 롤링'이다. 그가 필명을 사용한 것은  블룸즈베리 출판사와 계약하면서 [남자아이들이 여자가 쓴 책을 읽지 않으려 할 것이다]라는 출판사 제안에 따라 J.K. 롤링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조앤 롤링은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 ‘더 쿠쿠스 콜링(The Cuckoo’s Calling)’을 출판했다. 그녀는 [해리 포터]를 쓴 유명 작가가 아닌 오직 작품성으로만 평가받고자 필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앤 롤링은 부모님이 주신 첫 번째 이름이다. 첫 번째 결혼으로 갖게 된 두 번째 이름은 조앤 아란테스였다.  J. K. 롤링은 [해리 포터]를 쓰기 위해서 자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세 번째 이름이다. 로버트 갤브레이스는 [해리 포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에게 준 네 번째 이름이다. 그리고 지금은 닐 머레이와 재혼을 했기 때문에 조앤 머레이가 그의 법적인 본명이다. 5개의 이름을 경험한 ‘그녀’는 가장 자기답게 살았던 자신은 언제였을까?


필명(筆名)은 작가가 작품을 발표할 때 쓰는 펜네임(pen name)이라고 한다. 작가들이 필명을 쓰는 경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필명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많다. 예를 들어 박금이의 필명은 박경리이고, 이열은 이문열, 황수영은 황석영, 홍종현은 정이현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필명을 사용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거나, 성별을 감추거나, 슬럼프에서 벗어나거나, 오로지 글로만 평가받고 싶은 마음 외 수많은 이유로 필명을 사용한다.


조태현이라는 이름은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니라 부모님이 정해주신 이름이다

권민이라는 이름은 ‘자칼의 이빨’이 싫어서 내가 지은 이름이다.

권민이라는 이름은 두 달만 사용하고 폐기될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22년 동안 사용 중이다.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한다. 부모님은 나를 명명命名하여 조태현이라고 불렀지만, 운명은 나를 소명하여 권민이라고 불렀다. 권민이라는 필명은 나의 숙명이 되었다. 말장난 같지만 권민으로 인해서 名(이름)이 命(생명)으로 바뀌었다.


회고록을 쓰면 인생에 우연의 뒷모습을 볼 때가 있다. 김 이사를 만난 것, 김 이사에게 두란노 카피라이터를 지원하라고 전화를 받은 것, 두란노에서 비영리단체에 관한 책을 읽은 것, 이랜드에 입사해서 IMF를 겪게 된 것, 낮은 울타리에 근무하면서 패션인사이트에 권민이라는 이름으로 원고를 작성한 것. 기억에서 인과 관계없는 인연因緣과 우연偶然들을 열거해보면 촘촘하게 설계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하는 일과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연결해보면, 그 모든 것들은 반드시 일어나야 할 들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말한다. 불가항력적인 그 사건들이 지금의 모든 것을 이루는 점들이었다.



권민으로 태어나다. 

나는 낮은 울타리에서 32살에 ‘떠밀려’ 창업했다. 나를 뒤에서 밀어버린 존재가 어떤 운명인지 아니면 내 안의 욕망이었는지를 알 수 없다. 대략 기억의 그림자를 본다면 결국 선택한 것은 나였지만 그 선택의 기준을 세운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함이 32세부터 39세의 삶을 가장 밝고 어둡게 만들었다.


 이렇게 애매하고 기괴하게 나의 창업을 소개하는 것은 여전히 이 시간대와 공간은 나에게는 체르노빌 원자력 폭발 이후에 방사능 오염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을 생각도 하기 싫고 선택 망각으로 잠잠한 나의 뉴런에 자극도 주고 싶지 않다. 지금 체르노빌 주변에서 서식하고 있는 동물과 식물들이 기괴한 모습으로 변한 것처럼, 나의 이 시간대에는 모든 기억은 그렇게 오염과 기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시작부터 문제였다. 낮은 울타리에서 창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떻게 창업했는지에 대해서는 습윤밴드로 붙여 놓기만 하겠다. 갑자기 돈을 벌어야 하고 누군가의 월급을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지금 맡은 [문화사역 본부]의 본부장을 겸임해서 패션 컨설팅 회사를 만들어 보겠다고 제안했다.


 뜬금없이 패션 컨설팅 회사를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패션인사이트에 투고한 원고 덕분이었다. 간혹 사람들이 메일을 보내와서 컨설팅을 요청했다. 어떤 사람은 회사까지 찾아오거나 집 근처까지 찾아와서 그들의 문제점을 이야기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 018 PCS폰을 운영했던 한솔 그룹에서 일본의 유니클로 브랜드를 라이선스를 하고 싶다고 나에게 컨설팅을 의뢰했었다. 무려 컨설팅 비용으로 3억 원을 준다고 했다.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는 문화사역 본부장으로서 할 수도 없었고 같이 일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잦은 컨설팅 문의가 패션인사이트 정인기 부장을 통해서 계속 연락이 왔었다. 나는 이런 제안을 창업의 소스로 활용해서 패션 컨설팅 회사를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창업 투자비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말했던 계획은 바로 진행되었다. 이때까지도 [역사 속에서 나타난 비즈니스 선교]의 주역인 모라비안이 나의 롤모델이기에 회사 이름을 [모라비안 컨설팅]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비영리단체 경영의 핵심 가치를 투영해서 제대로(?) 된, 그러니깐 수익모델을 갖춘 비영리 경영의 기준을 세워보려고 했다. 7년의 세월을 망친 화재의 진앙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첫째는 모라비안이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 내가 모라비안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그 이름을 사용하면 절대 반지를 끼는 것처럼 갑자기 내가 모라비아인이 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이렇게 믿음을 갖게 되므로 나는 나를 보지 못했다. 둘째는 모든 컨설팅 오더는 1년 넘게 패션인사이트에 글을 쓴 권민이라는 존재가 만든 프리미엄, 그러니깐 한 마디로 ‘거품’이었다. 창업과 동시에 수많은 오더를 받게 되었는데 모두 패션인사이트의 후광효과이며 뒤바람이었다. 셋째는 함께 일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목적과 헌신일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지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기에 억지로 나의 배역에 충실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자신의 배역에 충실하길 원했다. 


넷째는 결국에는 ‘돈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섯 번째는 나의 경영철학은 비영리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영리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비영리 단체의 논리를 대입하고 비영리 조직에서 느끼는 관계와 문화를 만들려고 했다. 여섯 번째를 첫 번째에서 기인한 것이다. 나는 모라비안을 표방하는 사람이기에 이 정도의 섬김과 배려 그리고 헌신해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서 직원들이 원하지도 않는 것을 주었다. 책을 쓰고 공저로 이름을 올리거나 주식을 나누어주거나 회사를 세워주었다. 그러니깐 영화배우들이 자기가 맡은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일상생활을 못하는 것과 비슷한 증상이다.


일곱 번째는 …. 이렇게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100개를 말할 수 있다. 만약에 마지막 백 번째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비영리도 결국에는 돈이다. ‘결국에는 돈’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모든 갈등과 문제를 풀어보면 돈이 있었고, 그런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돈이었다.


 내가 모라비안 컨설팅을 시작한 것도 결국 돈이었다. 그때 돈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나는 모라비안 컨설팅을 창업했을까? 절대 안 했다. 절대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나는 창업에 대해서 아무런 동기부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사역 본부장을 하면서 10명 내외의 간사들과 일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것이다. 나는 결코 리더가 될 수 없다. 나는 내가 쓴 헬퍼십에 나온 것처럼 참모로서는 재미와 성과가 있었지만, 리더로서는 자질과 성향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나는 다시는 리더를 맡지 않고 창업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의 리더십의 부작용에 의한 책인 [리더십 바이러스]를 2005년에 발행했다. [리더십 바이러스]의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리더가 되면 왜 또라이가 될까? 또라이가 리더를 하는 것일까? 리더가 되면 또라이가 되는 것일까?’


나의 경우는 후자이다.


 결국에는 문제가 생겼고 나는 낮은 울타리에서 퇴사했다. 모라비안 컨설팅을 이름을 쓰지 못했고 모라비안 바젤 컨설팅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나는 작지만, 선명한 빛을 따라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살아왔다. 이제 그 빛이 내 눈앞까지 보였다. 나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빛에 손을 대었고, 결국에 그 불길은 나의 온몸에 태우고 화상을 입혔다. 모라비안 컨설팅을 시작하는 것 자체로 이미 나는 이미 그것도 모르고 창업했다.


나는 아내의 산통을 모른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하기가 좀 난감하지만, 조태현에서 권민이 되는 산통을 경험했다.

배속의 태아가 나오고 싶어서 나올까? 아이들의 울음을 보면 절대 아닌 것 같다.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산모와 아이가 서로 죽지 않기 위해서 이별을 해야 한다. 서로에게 끔찍한 시간이다. 감히 출산과 비교해서 부끄럽지만, 나의 창업과 권민도 이런 끔찍한 시간을 경험했다. 때가 되어 조태현에서 권민이 되었다. 



——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고, 시기가 있는 법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고, 건축할 때가 있다.

울 때와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와 춤출 때가 있다.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들을 모을 때가 있고, 껴안을 때가 있고, 그것을 멀리할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고,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어 버릴 때가 있고, 수선할 때가 있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전쟁할 때가 있고, 화평할 때가 있다.

일한 사람이 자기의 수고로 얻는 것이 무엇인가?

—-

솔로몬 대왕의 전도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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