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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수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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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Jan 20. 2024

기도 금단 현상

잠을 깨는 기도

불면증 때문에 커피를 끊었습니다.

커피 금단 현상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편두통이었습니다.

카페인 금단 현상으로 졸림, 피곤, 불안, 정신운동 기능 수행 장애, 구토, 하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밀가루 음식도 같이 끊어서 두통 금단 현상은 두 배인 것 같습니다.

탄수화물 금단현상도 살펴보니 기침, 가래, 갈증, 졸림, 소화 장애, 두통, 집중력 장애, 우울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프고 우울했죠.


이런 금단현상을 신앙생활에서도 겪은 적이 있습니다.

‘특별’ 기도를 끊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끊은 기도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인본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면 하나님의 마스터플랜도 변경할 수 있다는 신념입니다.

돌이켜 보니 그것은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교인들은 ‘특별’을 좋아합니다. 특별 새벽 기도, 특별 집회, 특별 부흥회. 

인간 스스로 이벤트를 만들고 그것을 특별하다고 합니다. 

인간 마음대로 거룩하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을 붙이면 은혜를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나요?


예수님은 38년 동안 다리가 마비되었지만, 특별한(?) 현상을 기다리는 병자를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요 5:3-8, 새 번역] 
3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6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7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병자는 오랜 시간 동안에 물이 움직이는 ‘특별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물이 움직였을 때 자신보다 먼저 들어갔던 사람이 나은 것을 본 적이 있을까요?

그것보다 이 병자는 정말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정말로 천사를 시켜서 못의 물을 휘저어서 선착순을 시키셨을까요?

그는 수십 년 동안  특별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을 움직이지 않으시고 병자의 마음을 말씀으로 휘저었습니다.

“일어나라”


이 사건을 통해 저의 신앙도 휘저어졌고 바뀌었습니다.

저는 기도란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특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00개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하고, 주말에는 2시간 넘게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기도 리스트에서 내가 구하는 것들이 하나씩 이루어지는 신앙 재미가 청약저축 넣는 것처럼 쏠쏠했습니다.

저는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휘저어] 감동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천사가 물을 휘젓는 주랑 사건으로 나의 기도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휘저어 놓는 주님 말씀에 반응했는가?

내 기도는 말씀의 반응인가? 나의 욕망 해소인가?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구하는 것은 여전히 나의 생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나의 존재적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특별기도를 멈추었습니다. 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나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에게 나의 필요를 구하는 것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기도를 끊은 것이 아니라 내가 구하고 싶은 것을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 기도 시간은 뻘쭘해졌고, 짧아지고, 초조해졌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하지 않아서 나의 필요를 잊고 놓칠 것 같은 두려웠습니다. 금단현상이 왔습니다.

제 믿음은 그렇게 바로 바닥이 드러냈습니다. 

기도 금단 현상은 [염려와 두려움]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아신다고 했는데, 왜 나는 나의 필요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것을 주장할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말장난 같지만 진짜입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기다리다가 지친 아론과 유대인들이 만든 송아지 여호와와 비슷한 것입니다. 

[출 32:4-5, 새 번역]
4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5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 하고 선포하였다.


그렇다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구하는 기도는 하지 않지만, 반면에 듣는 기도는 더 늘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이루려는 마음은 계속 마음에 일어났습니다.

나의 기도를 구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씀과 뜻을 찾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할까? 정확히 말하면 왜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다른 기도를 해야 할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21:36, 새 번역]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기도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기도, 깨어나기 위한 기도입니다.

나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가 주님 앞에 서는 기도와 깨어있는 기도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뭔가 받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한] 기도임은 틀림없습니다.


[마 26:41, 새 번역]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에서 제자에게 말씀하신 것은 [깨어 기도하라]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에게 대해서 [잔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 언어로 말한다면 죽은 사람이고,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자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죽은 사람과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자는 사람입니다.


[골 4:2, 새 번역]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예수님은 기도하는 이유를 깨어 있기 위해서, 깨어 있으려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나의 기도 제목은 깨어있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랑에 앉아서 물이 움직이는 환자는 깨어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는 것일까요?

우리는 말씀 안에 있을 때 깨어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에 가까운 신앙은 자는 것이죠.


천사가 물을 휘저어 놓는 특별한 시간을 기다릴까?

주님이 내 마음을 휘저어 놓을 말씀을 읽을까?

저는 기도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기도합니다.

말씀을 깨닫기를 기도하고,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서 기도(하려고)합니다.

나를 깨우는 기도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항상 깨어있도록 하는 기도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에서 깨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빌 3:10-11, 새 번역]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바울 사도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고전 11:1, 새 번역]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땅에서 나의 기도 제목이 많은 것은 진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바울의 기도 제목은 딱 하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죽음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죽음 이후에 이루어질 기도를 이 땅에서 했습니다.

반면에 저의 기도 제목은 이 땅에서 누리는 기도였습니다.

나도 바울 사도처럼 기도할 수 있을까?

아니, 나도 바울 사도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두렵고 마음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도 바울 사도처럼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죽음을 본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나의 죽음을 위한 기도는 내가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원천침례교회 / 민트교회(담임목사 이계원)의 교인입니다. 

https://www.wonch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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