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색이다
“나는 여기에 속해 있는 걸까? 아니면 파도처럼 다시 어둠이 가득한 바다로 끌려가게 될까.”
흑백요리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에드워드 리는 6일 전, 손글씨로 쓴 세 장의 글을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오늘 아침, 알고리즘 덕분에 나도 그 편지를 보게 되었다.
그의 글을 파인다이닝 요리처럼 플레이팅(plating)으로 정리한다면 소속감과 정체성이다. 셰프의 글답게 모든 문장에 박혀있는 단어마다 본연의 냄새가 났다.
에드워드 리의 글을 읽으며, 최근 어느 단체의 송년의 밤에서 만난 그분이 떠올랐다.
“저는 아직 명함을 못 만들었어요. 일단 예전 명함을 드리겠습니다.”
대기업의 ‘김부장’은 아니었지만, 예전에 다녔던 기업은 100대 기업 중 하나였고 직함도 경영전략본부장(상무)이었다. 퇴사한 지 6개월이 넘었는데도 그는 아직 그 회사 명함을 쓰고 있었다.
예전에 내 친구도 예전 명함을 1년 동안 가지고 다녔다. 심지어 자신의 회사를 만들어 새 명함이 있어도 가끔씩 예전 직장 명함을 사용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영업용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렇게 말해주었다.
“새로운 명함을 주면 그것으로 끝나는데 예전 기업 명함을 주면 대우가 달라진다.”
은퇴 같은 퇴직을 한 중장년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공감할 것이다.
주된 직장에서 은퇴(퇴직)한 뒤, 직함이 없는 내 이름은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에드워드는 글에서 1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인이 되는 것을 음식으로 51년 동안 기다렸다고 했다.
예전 명함을 사용했던 그들도 30년 동안 직장인으로 살다가 처음으로 개인이 되었다.
에드워드 리와 내 친구, 그리고 나에게 예전 명함을 준 그분도 모두 소속감과 정체성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다.
수십 년 다녔던 직장에서 은퇴를 앞두고 있다면 이제 ‘더 잘 사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 ‘자기답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동안은 자신을 혹사하며 ‘되어야 하는 나’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되고 싶은 나’로 살아갈 여건이 조금씩 마련된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할 가능성이 생기고, 무엇을 덜어낼지 고민할 시간이 주어진다. 이것이 소속감과 정체성의 새로운 계절인 인디언 서머다. 이 시기의 과제는 분명하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없어도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에드워드 리의 편지 때문에 나는 보지 않았던 흑백요리사 유튜브에서 에드워드 리를 찾아 보았다.
그가 만든 비빔밥 요리를 소개하며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비빔인간입니다. 많은 문화 있어요. 한국 미국 다른 나라 요리 공부. 솔직히 말하면 제가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고생했어요. 제가 미국 사람인가 아니면 한국 사람인가 비빔밥은 처음 보면 재료 여러가지 있고 근데 섞어서 한 가지 맛을 만들어요.”
그는 비빔밥을 만들었지만, 함박스테이크처럼 포크와 나이프로 잘라 먹는 비빔밥을 만들었다.
나는 흑백요리사 시즌 1의 영상을 보고 비로소 미국에서 잘 나가는 교포가 쓴 세 장의 글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그가 원했던 소속감이 무엇인지 정체성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쓴 이 한줄의 글이 가슴으로는 아프게 느꼈다.
“나는 한국의 바위에 달라붙은 미역이 되어 내 집이라 부르고 싶어요.”
수십 년 전에 한국에서 잘 나가던 대기업 임원이 미국에서 세탁소를 했던 것처럼, 파키스탄에서 핵물리학 박사가 우리나라 폐지 공장에서 일하는 것처럼, 주된 직장에서 은퇴 같은 퇴직을 하면 이런 상황에 놓인다. 나이 때문에 할 일이 없어지는 세상으로 밀려나가게 된다.
수십 년 동안 직장인으로 소속감을 얻고 그 소속감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온 사람이 퇴직을 하면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소속감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그 소속감과 정체성을 극복하고 자기다움으로 당장 이겨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에드워드 리도 1년 걸렸고 내 친구는 3년, 나는 5년이 걸렸다. 이것은 극복이 아니라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런 소속감의 부재에서 나오는 정체성의 파도는 혼자 넘기 힘들다. 서로의 바위가 되어줄 연합과 공동체가 필요하다.
(연재 글은 2026년에 런칭할 uni time 콘텐츠를 소개하는 티저 캠페인(teaser campaign)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