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을 멈추면 위기가 온다
그것만이 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세계관은 그 판단을 만드는 렌즈다. 누군가에게 지구는 죽어 가는 별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성장 가능한 시장이듯,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내 렌즈’로 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까?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은 의외로 쉽게 드러난다. 로그인된 유튜브 초기 화면을 보면 된다. 그곳에 뜨는 영상 목록은 취향의 전시가 아니라, 내가 반복해 온 선택의 기록이다. 내가 돈을 가장 많이 쓰는 곳, 내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곳에 내가 사는 세계가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에 살면서도 같은 세상에 산다고 착각한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내가 만든 것인가, 남의 세상을 따라 만든 것인가.
중장년의 퇴직과 은퇴 이후에는 이 질문이 더 이상 철학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해 ‘진짜 현실’로 넘어가듯, 퇴직 이후에도 비슷한 전환이 찾아온다. 그동안 현실이라고 믿고 살았던 세계가 무너진다. 그때 사라지는 것은 직장 하나가 아니라, 내가 살던 세계 전체다. 퇴직과 은퇴는 직장을 잃는 일이 아니라, 내가 살던 세계가 사라지는 일이다.
세계가 사라지면 그 세계가 만들어 준 믿음도 흔들린다. 그제야 우리는 중력을 잃은 듯한 감각을 겪는다. 발을 디딜 곳이 사라지고, 몸이 공중에 뜬 듯하다.
나는 수영을 처음 배울 때를 떠올린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서 물을 먹고 공포를 느꼈다. 출근할 곳이 없다는 사실도 비슷하다. 어디에도 발을 디딜 수 없고, 몸이 먼저 흔들린다. 그래서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정보를 모은다. 그러나 대개는 불안과 공포를 키우는 이야기만 더 많이 쌓인다.
젊었을 때는 학력과 경력의 벽이 사람을 구분한다. 그런데 50대 이후에는 생물학적 나이가 더 먼저 사람을 분류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누구인가’보다 ‘내가 몇 살인가’로 존재가 평가된다. 그래서 중장년의 세상 전환은 더 거칠게 느껴진다. 내 정체성을 붙들던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나는 1985년 들국화의 노래 〈그것만이 내 세상〉을 떠올린다. 한 사람이 자기 세계를 끝까지 붙드는 선언처럼 들린다. 한 시대에 이 노래가 절박하게 불렸던 이유도 결국 비슷했을 것이다. 남이 정한 세계가 아니라, 내가 서야 할 세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근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드라마 속 ‘김 부장’에게서 이런 요지의 말을 들었다. 젊었을 때는 앞만 보고 달리라고 하더니, 나이가 드니 주변도 보라고 한다는 한탄이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장을 세상의 변덕으로만 보지 않는다. 젊을 때의 “앞만 보고 가라”는 말은 성장의 방식이고, 나이가 든 뒤의 “주변도 보라”는 말은 삶을 지속시키는 방식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달리는 법만 배운 채로 전환기를 맞이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모두 원본으로 태어나지만, 어느새 복사본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직장이라는 거대한 복사기에서 나와 좌표 없는 은퇴의 광야에 선 지금, 나는 다시 원본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다. 40년 전 불렀던 그 노래를 다시 불러야 할 때다. 이제는 남이 만든 조직의 세상이 아닌, 진짜 ‘나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잊지 말자. 많은 중장년의 위기는 40대에 세상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모험을 멈춘 순간부터 시작됐다.
이제는 정말로 내가 만든 세상이어야 한다. 내 세계관을 다시 세우고, 내 삶의 규칙을 다시 만들고, 내 시간을 다시 배치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퇴직 이후의 세계는 끝이 아니라, 내가 진짜로 살 세계를 새로 짓는 시작이다. 퇴직과 은퇴로 세상은 리셋되고, 남의 세상이 아니라 내가 만든 세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것만이 내 세상이다.
Aging이 아니라 Branding(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