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2월 31일부터 시작한다
두괄식 인생: 2026년 1월 1일, 나는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구절이다.
20여 년 전, 서점에서 이 문장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전율을 기억한다. 결말을 먼저 던지는 이 도입부는 소설의 끝까지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었다.
2026년 1월 1일이다. 해마다 새해는 오지만, 중장년에게 새해는 ‘새 출발’보다 ‘정리’에 더 가깝다. 무엇을 더할지보다 무엇을 덜어낼지, 무엇을 성취할지보다 무엇을 남길지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대로 흐르지만, 그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은 달라진다.
나는 요즘 새해를 계획표로 맞이하지 않는다. 대신 마지막 장을 먼저 펼쳐 보는 마음으로 맞이한다. 장편소설의 마지막 장을 먼저 읽고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면, 독자는 “주인공이 어떻게 될까”를 따라가기보다 “왜 이런 결말에 이르렀을까”를 추리하게 된다. 결말을 알고 읽는 삶은 오늘의 선택을 복선으로 만들고, 하루의 방향을 분명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 방식을 ‘두괄식 인생’이라 부른다. 결말을 먼저 정하고, 그 결말에 어울리게 오늘을 편집하는 삶이다.
브랜드도 비슷하다. 어떤 브랜드는 스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능보다 경험과 감정으로 기억한다. 결국 브랜드는 생산자가 주장하는 문장이 아니라,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설명 속에서 굳어진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한 가지 질문을 더 깊게 묻게 된다. “그렇다면 나의 자기다움도, 타인이 타인에게 말하는 나의 설명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죽은 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자주 생각한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삶이 흩어지지 않게 만들고 싶어서다. 삶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가치와 행동이 쌓인 결과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떤 문장으로 남을지, 나는 미리 정해 두고 싶다.
죽음을 기준으로 삶을 조율하는 것은 회피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줄을 팽팽하게 만드는 일이다. 현악기의 줄을 당기면 소리가 또렷해지듯, 결말을 떠올리면 오늘이 또렷해진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누구에게 끌려다니지 말아야 할지가 분명해진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나는 ‘엔텔러키 브랜드’의 편집장으로 기억되고 싶다. ‘자기다운 나’와 ‘우리’의 의미를 함께 품은 말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루고 싶은 특집이 “자기답게 죽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삶을 정렬시키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다움 학교’의 코치로 기억되고 싶다. 중장년의 인생 2막이 방향을 잃지 않도록, 자기다움과 우리다움을 배우는 장면을 만들고 싶다. 예전에 ‘브랜드 골목대학’에서 골목가게 주인들과 함께 배웠던 시간이 내 안에 오래 남아 있듯, 사람은 설명으로 바뀌기보다 장면으로 바뀐다고 믿는다.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지만, 결말을 정하면 내 삶의 기승전결이 바뀌기 시작한다. 읽는 책이 달라지고,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잠들기 전 붙잡는 생각이 달라진다. 결말을 정하니 오늘이 정렬된다.
2025년 12월 31일 밤, 나는 질문을 적는다. “나는 어떤 한 문장으로 남았나.” 그리고 그 한 문장에 맞추어 2026년을 정렬한다.
새해 첫날, 스스로에게 던질 세 가지 질문을 노트에 적는다.
첫째, 2027년 1월 1일 아침, 내가 서고 싶은 결정적 장면은 무엇인가.
둘째, 그 장면을 위해 올해 끝까지 지킬 단 하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셋째, 그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내 삶에서 오늘 버릴 군더더기는 무엇인가.
이 질문 끝에, 나는 한 문장을 덧붙인다. 이것은 알베르 카뮈에 대한 오마주다. “2026년 12월 31일, 내가 죽었다.”
이것은 염세적인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을 해석하는 가장 강력한 주석(註釋)이 된다. 톨스토이는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했다. “그의 생애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끔찍했다.”
나는 끔찍하게 평범한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 타인의 삶을 살다가 죽는 것이다. 인생의 비극은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는 법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결정하면 오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만약 2026년 12월 31일에 내가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하다가 죽었을까? 바로 이 장면에서, 나의 2026년 1월 1일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