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이후, 속도가 아니라 좌표로 사는 법
나는 10년 동안 쏘렌토를 몰며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속도계 끝에 적힌 240km라는 숫자다. 그 속도는 정말 가능한 걸까. 아니면 그 숫자는 애초에 ‘밟지 말라’고 적어 둔 죽음의 경계선일까. 이런저런 도로 조건들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밟아 본 최대 속도는 120km쯤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차를 폐차할 때까지 성능의 절반만 쓰는 셈이다.
4년 전, 이 의문은 차에서 인생으로 산불처럼 번져갔다.
“내 인생에서 나는 240km로 달려본 적이 있나.”
그때 나는 회사 임원이었다. 조직 안에서 나의 속도는 연봉과 직급으로 표시되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진짜 ‘나’의 속도였을까. 야근과 이른 출근이 열정의 속도였는지, 아니면 도로의 흐름을 맞추기 위한 조직의 규정 속도였는지, 지금도 모호하다.
나는 창업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속도에는 천장이 있었다. 임원이 최고 속도였다. 240km를 밟는다고 해서 사장이 될 수는 없었다. 직장이라는 도로에는 표준 속도가 있었고, 그 표준 속도는 나를 안전하게 데려다주었다. 그러나 그 안전이 곧 나의 최대치였는지는,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할 때는 조직이 정한 계기판을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돈을 받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부터 질문이 바뀐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달릴 것인가. 나는 어떤 신념으로 달리는가. 무엇을 위해 인생의 속도 페달을 밟는가. 그때부터 문제는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좌표’였다.
나는 결국 ‘최대 120km’의 조직 속도에 맞춰 달리다 퇴직을 맞았다. 그리고 그때 퇴직은 멈춤이 아니라, 중력의 소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월급이라는 중력이 사라지자 나는 도로 위의 핸들을 놓친 채, 진공의 우주로 튕겨 나간 기분이 들었다.
직장 생활의 대시보드는 단순했다. 차선을 따라가고(결재), 추월하고(성과), 목적지에 도착하면(목표 달성) 끝이었다. 그러나 퇴직 후 마주한 1인 기업가의 삶은 자동차 운전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 보는 숫자와 알림판으로 가득한 우주선의 조종석이었다. 직장인일 때는 보지 못했던 자녀 교육 자금, 주택 이자, 부모 부양, 노화하는 신체, 그리고 불투명한 비즈니스를 알려주는 계기판을 수시로 보아야 한다. 전방만 주시하던 운전은 끝났고, 이제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변수들을 한 화면에 띄운 채 항로를 결정해야 했다.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직장이라는 도로에서 시속 120km로 달리던 방식으로는, 창업의 대기권을 뚫고 홀로 궤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때부터는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추력이 필요했다.
이것은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바퀴가 구르는 땅의 논리가 끝나고, 추진력으로 버텨야 하는 우주의 논리가 시작된 것이다.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려 해도 예전 방식으로는 추력을 낼 수 없고, 착륙을 시도하려 해도 그 감각은 난생처음 겪는 공포에 가깝다. 무엇보다 익숙한 운전대가 사라졌다. 내 손에 익은 핸들 대신,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예민한 조작 감각으로 나를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그 낯섦을 견디며, 궤도 진입을 시도했다.
12명이 만들던 잡지를 혼자 기획하고, 인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과 씨름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 과정에서 매출 목표 대신 소명과 자기다움이 새로운 계기판으로 켜졌고, 나는 그 계기판을 보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더 많이가 아니라, 더 분명하게. 더 빨리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2026년 1월 7일, 유니타스라이프(www.unitaslife.net)라는 우주정거장을 띄웠다. 우주정거장은 홀로 유영하는 이들이 도킹하여 재보급을 받고, 좌표를 수정하며, 동료를 만나는 곳이다. 나에게 그 재보급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먼저, 동료다. 혼자 떠 있는 사람에게는 서로의 존재 자체가 구조 신호가 된다. 다음은 시간교환이다. 1인 기업가에게 시간은 화폐보다 먼저 닳아 없어지는 자원이다. 시간을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의 생존 장치를 공유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멘토링이다. ‘정답’이 아니라 ‘항로’를 나누는 일, 시행착오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통과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마지막은 프로젝트 협업이다. 혼자서는 닿지 못하는 거리를, 함께 밀어 주며 도착하는 방식이다. 홀로 버티는 세계에서, 함께 항해하는 세계로 옮겨 타는 일이다.
중장년에게 필요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한 또 하나의 ‘조직’이 아니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배우는 ‘중년의 학교’다. “당신은 무엇을 팔 수 있습니까?”보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 수 있습니까?”를 먼저 묻는 곳. 속도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에게, 좌표를 다시 세우게 하는 곳. 나는 그 기능을 우주정거장이라는 비유로 붙잡아 두고 싶었다.
나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쏘렌토가 240km를 갈 수 있는지, 포르쉐가 350km를 갈 수 있는지는 이제 결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땅 위의 이야기다. 내가 확인하려는 것은 차의 성능이 아니라, 중력이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나’라는 존재의 설계 목적이다.
나는 지금 인생의 속도계에서 ‘240km’를 넘는 모험을 하고 있다. 내 삶의 목적을 위해 선택과 집중, 그리고 실행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용기다. 그러나 내가 진짜로 넘어서려는 것은 속도 자체가 아니다. 나는 내 인생의 속도를 ‘어떤 기준으로 잴 것인가’부터 다시 정의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거듭나고 있다.
내가 죽는 날, 쏘렌토를 몰 때 품었던 의문처럼 내 성능의 절반만 쓰고 살아왔음을 그때 비로소 깨닫는다면, 그것은 인생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