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아지는 삶
“이것도 다 은행 집이야” 친구의 화려한 전원주택이 ‘무덤’처럼 보였다.
새집을 장만한 친구의 초대로 집들이를 다녀왔다. 서울 아파트를 처분하고 경기도의 전원주택으로 이사한 친구였다. 넓은 정원과 탁 트인 경치, 은퇴 후 누구나 꿈꾸는 그런 집이었다. 주변 전경을 보며 부러워하는 우리에게 친구가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이것도 다 은행 집이야. 모기지로 샀어. 엄밀히 말하면 내 것은 이 뒷마당뿐이야.”
모기지(Mortgage)라는 단어는 죽음(Mort)과 서약(Pledge)이 결합된 말로, 직역하면 ‘죽은 담보’, 끝나야 비로소 소멸하는 계약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이제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아이를 묻은 단지’에서 유래했다는 애물단지가 지금은 그저 ‘처치 곤란한 물건’을 뜻하듯, 모기지 또한 죽음의 서약이라는 섬뜩한 어원보다 ‘평생 갚아야 할 짐’으로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그 멋진 집이 갑자기 ‘꿈’이라기보다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죽음의 시간표’처럼 보였다.
문제는 40대 이후다. 금융 모기지에 묶이면 노후 계획은 ‘빚 갚기’로 수렴하기 쉽다. 일단 인생 프로젝트인 집을 사게 되면 삶은 노곤하고 긴장이 풀어지는 미지근한 온탕이 된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아서 위험을 위험으로 느끼지 못한 채 오래 머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서서히 삶아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로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개구리는 온도가 오르면 뛰쳐나오려 한다. 그런데 인간은 뛰쳐나오지 못한다. 못 뛰게 만드는 건 무감각이 아니라 관계·책임·빚·체면·경력이라는 ‘뚜껑’ 때문이다.
조직 생활도 비슷하다. 주변에서 하나둘 퇴사와 은퇴가 시작되는데도 “나는 아직 아니야”라며 여전히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미지근한 조직 안에서 버틴다. 물 온도는 조금씩 올라가는데, 아직은 따뜻하다는 착각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엔, 이미 늦어 버린다.
집들이에 모인 친구들은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가 떨어지면서, 어느 순간 삶아지는 개구리 인생을 후회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과장 때 사내 벤처로 나갔어야 했어. 그때 나간 동기는 지금 매출이 450억이래.” “나는 부장 때 스카우트 제안받았을 때 움직일걸. 이렇게 명퇴당할 줄 몰랐지.” “나도 나가고 싶지. 하지만 이 나이에 이만큼 월급 주는 데가 없잖아.”
많은 중장년이 연봉을 자신의 가치로 착각한다. 높은 연봉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다른 생각을 못 하게 만든다. 내가 지금 삶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의 ‘물 온도’를 점검해 봐야 한다. 아래 질문을 받을 때 비로소 내 마음의 진짜 온도를 알 수 있다.
나의 업무 분야에서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나?
나에게 결재를 받으러 오는 사람보다, 배우러 오는 사람이 더 많은가?
나는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나?
지금보다 다른 미래를 상상하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고 의심하나?
탁월한 결과를 위해서 여전히 지금 상태를 의심하고 있나?
이 질문들에 자신 있게 ‘네’라고 답한다면 온도는 아직은 차가울 수 있다. 하지만 답하기 어렵고 어제와 오늘이 별 차이 없이 편안하게만 흐른다면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나도 모르게 삶아지는 개구리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물이 너무 뜨거워져 튀어 나갈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미지근한 물이 주는 거짓 안락함을 경계해야 한다. 나중에 돌아보면 그 높은 연봉과 직책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함정이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안전하다. 당분간 평안하다. 지금은 괜찮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 문장이 나오는 순간, 미지근한 물은 이미 뜨거워지고 있다. 생각이 멈춘 채로 나는 삶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당장 조기 퇴사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서서히 뜨거워지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되겠지’라며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스스로를 기만하지 말자는 것이다. 모든 직장인은 반드시 은퇴를 맞이한다. 예외 없이, 끓는점은 온다.
지금 내 연봉과 직책은 성공일까? 나를 멈추게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