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라는 대본쓰기

내일 일기: 삶의 지문을 남기는 대본

by 권민

나는 내일을 대본으로 쓰고, 오늘을 지문으로 산다.


배우들의 대본을 보면 메모가 가득하다. 대사에 대한 메모가 아니라, 대사를 말할 때 배우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표정과 호흡으로 연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문(地文)’이 빼곡하다. 한 장면을 어떤 감정과 의도로 통과할지, 어디에 멈추고 어디에서 돌아볼지, 그 모든 길 안내가 지문에 들어 있다.

나도 일기에 지문을 적는다. 오늘을 정리하기보다 내일을 먼저 써서 하루를 준비한다. 그래서 이 일기를 ‘내일 일기’라 부르고, 더 정확히는 내가 나의 배역을 하는 ‘자기다움 일기’라 부른다.


자기다움 일기의 가장 큰 특징은 하루 일정 옆에 지문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지문은 장면에서 벌어질 상황과 동선, 필요한 소품, 그리고 인물의 현재 심리를 알려준다. 지문은 배우의 기분이 아니라 작품의 방향이다. 그래서 자기다움 일기에 쓰인 모든 일정 옆에는 ‘자기답게 행동하기 위한 지문’이 함께 놓인다.


예를 들어 이렇게 적는다.


AM 10:00 브랜드 창업 세미나 기획 회의

(소수 의견을 먼저 듣는다. 웃으면서 말한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대답은 3초 후에 말한다)


여기서 괄호 안 문장이 자기다움을 위한 지문이다. 이런 문장을 적는 이유는 평소에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반사적으로 다수 의견에만 귀를 기울이기 쉽고, 회의는 토의로 시작했다가 다툼으로 끝나기도 한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지문이 필요하다. 지문이 있다고 실패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문이 있으면 실패를 다시 읽을 수 있다. 점심시간에 지문을 보며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로 했는지 다시 점검할 수 있다. 저녁에 내일 일기를 다시 읽으며 지문과 달랐던 행동을 돌아볼 수 있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 하루가 바뀐다. 행동이 바뀌고, 마음이 따라온다.


흥미로운 것은 ‘지문(地文)’이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지문(指紋)’이 된다는 점이다. 손끝이 닿는 곳마다 지문이 남듯이, 반복되는 행동은 내 하루에 흔적을 남긴다. 자기다움 일기는 내 삶에 ‘나의 흔적’을 남기는 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다움 일기는 “오늘 내가 나처럼 살았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인생의 지문(指紋)이다. 사람의 지문이 모두 다르듯, 자기다움 일기도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내가 질문과 지문을 중심으로 내일 일기를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방식이 자기다움을 유지하는 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악기의 음을 맞추듯 나를 나에게 조율한다. “나는 오늘 무엇을 피하려 했는가?” “나는 오늘 무엇을 붙잡으려 했는가?” “나는 내일 어떤 태도로 하루를 시작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적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 그리고 각 일정 옆에 지문을 넣어, 내가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지 구체화한다.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더 붙이면 더 분명해진다. “내일 나는 무엇을 하지 않기로 정하는가?”


이렇게 쓴 자기다움 일기는 시간이 지나면 더 선명해진다. 분기나 1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으면, 내가 왜 지금의 인생에 와 있는지 알게 된다. 나의 길이 우연이 아니라 반복된 선택의 결과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나의 오늘을 기록하는 것은 일기다. 오늘의 나를 관찰하는 것은 자기다움 일기다. 일기는 저녁에 쓰지만, 자기다움 일기는 새벽에 쓰고 저녁에 읽는다. 그래서 자기다움 일기의 목적은 ‘자기다움 쓰기’가 아니라 ‘자기다움 읽기’가 된다. 자기다움 일기는 자기답게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한 일일 사용 설명서다.


무대가 분명한 사람은 직업이라는 리듬이 있다. 반대로 직업이 없거나 전환기에 있는 사람은 하루를 점검할 ‘무대’가 없다고 느끼기 쉽다. 그래서 오히려 내일 일기가 더 필요하다. 무대가 흐릿할수록 대본이 필요하고, 방향이 흐릴수록 지문이 필요하다. 그래야 인생이 남이 써준 각본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장면들로 채워진다.


이런 일기를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나는 배우처럼 살아가되, 남이 준 배역을 연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 내일의 대본을 쓰고 오늘의 행동을 점검한다. 나는 인생의 단역이 아니라 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주연으로 내 삶을 살고 싶어서 자기다움 일기를 쓴다.

“지문(地文)은 반복되면 지문(指紋)이 된다.”



아래 대본은 영화 <동주>의 배우 박정민의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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